[44] 백년(百年) - 문 태 준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43]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 박 성 우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42] 사랑 - 박형준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 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41] 농 담 - 이 문 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4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39] 마치…처럼 - 김 민 정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새끼고양이가 잠들어 있다는 거 물든다는 거 얼룩이라는 거 빨래엔 피존도 소용이 없다는 거 흐릿해도 살짝, 피라는 거 곧 죽어도 빨간 수성사인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거 ▲ 일러스트=클로이 가장 젊고 발랄한 세대에 속한 시인은 언젠가 문예지에 자신의 시..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38]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37] 마른 물고기처럼 - 나 희 덕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36] 서귀포 -이홍섭 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 애송詩 사랑詩 2012.11.23
[35] 바람 부는 날 -김종해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 애송詩 사랑詩 2012.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