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2005년>
밀감이 익는 멀고먼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도는 동해 바닷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외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무잡잡한 시골 소녀가 아까워하며 한쪽씩 떼어 먹던 '서귀포 밀감'. 향긋한 밀감 마을에서 사람들은 밀감 같은 사랑을 나누겠지.
이홍섭(43) 시인의 〈서귀포〉를 읽으면 어렸을 적 아껴 먹던 밀감 맛이 되살아난다. 달콤새큼한 밀감 맛은 내게 묘한 위안을 주었다. 우울할 때 밀감을 한쪽씩 떼어 물면 위로가 되었다. 슬플 때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나면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처럼. 이 시를 읽다 보면 '울지 마세요' 말하며 누군가 살그머니 밀감 한 바구니를 내미는 것도 같고, '몰래 울고 있는 당신'이 더듬는 검은 현무암 담장을 배경으로 자디잔 흰 귤꽃들이 잔별처럼 흔들리며 괜찮다…괜찮다…, 그러는 것도 같다. 강릉 출신의 이홍섭 시인이 어른이 되어 서귀포를 다녀온 후 쓰게 되었다는 이 시에는 동쪽과 남쪽과 서쪽을 떠도는 한 생애의 유랑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의 이름은 인생. 떠도는 인생에 대한 탁월한 메타포인 이 시가 이홍섭을 통해 세상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동쪽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가도 가도 서쪽'인 불가(佛家)의 이상향인 서방정토(西方淨土)가 서쪽으로 돌아가는 서귀포(西歸浦)에 포개져서 아득한 공명을 일으킨다. 이 시가 실린 시집 제목은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인데, '서쪽'에 대한 시인의 향수는 관념적, 종교적 지향 이전에 그의 태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리라.
오래 전 어느 겨울날 인사동 거리를 헤매며 술집을 찾아가던 벗들에게 살그머니 밀감 봉지를 내밀던 그를 기억한다. 추운 날 손을 호호 불며 마지막 떨이를 하려는 좌판 할머니에게서 밀감을 몽땅 산 시인은 말했다. "밀감이 참 고와서…." 참, 이런 고운 시 하나! '한 아이가 돌을 던져 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달맞이꽃〉 부분). 연시(戀詩)가 시의 절정이자 궁극이라 믿는 그가 세상과 사람에게 살그머니 말 걸 때면 세상이 참 조용해진다. 엉엉 울어도 그 속의 따뜻한 고요가 살아난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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