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詩 사랑詩

[37] 마른 물고기처럼 - 나 희 덕

yellowday 2012. 11. 23. 07:25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장자(莊子)》의〈대종사(大宗師)〉에서 빌어옴.

▲ 일러스트=클로이

〈반 통의 물〉이라는, 나희덕 시인(42)의 아름다운 산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시인이 남의 땅을 조금 빌려 텃밭을 가꿀 때의 일이다. 몸 한쪽이 마비된 할아버지가 근처에서 역시 텃밭을 일구는데, 물을 주려고 떠오다 보면 채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 그 노인은 매일같이 쉬지 않고 그 일을 했고 길은 늘 흥건히 젖었지만 그 어느 빛나는 길보다 아름다웠다고 적고 있다. "몸에 피가 돌지 않는 것처럼 문득문득 마음 한쪽이 굳어져가는 걸 느끼면서, 절뚝거리면서, 그러면서도 남은 반 통의 물을 살아 있는 것들에게 쏟아 붓고 싶은 마음, 그런 게 아니었을까"라고 그녀는 썼다. '한 통 가득'이 아니면 어떤가. 반 통의 물만 남아 있어도 그것을 살아 있는 것에 부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는 시를 쓴다. 생명의 살림과 노고와 그에 대한 위로가 늘 그녀의 시를 적신다.

나희덕의 시는 '어둠 속에서 잠시만 함께 있자'는 청(請)을 들어주며 그 마음을 헤아리다가 마침내 "사랑이라는 것이 혹시 모순적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다가간다. 물이 빠져나간 연못의 물고기처럼 세상의 두려움에 휩싸인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고를 바치는데 느닷없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오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두려움'에 빠진 마음을 애써 감싸주고 있는데, 그가 나의 감쌈을 빠져나갈까 두려워진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의 알량한 크기라는 것만큼 서글픈 자각이 또 있을까. 그러나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닌, 그저 수굿이 사랑의 허약함과 모순을 인정하는 것은 별 볼일 없는 우리네 평범한 사랑도 어엿한 사랑이라는 역설의 위로를 던진다. 사랑이라 잘못 부르는 '집착'의 불구덩이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준다.

밥상 위에 오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린' '마른 물고기' 반찬이 주는 기시감(旣視感)의 정체는 사랑이다. 정작 자유롭게 상대의 영혼을 풀어주는, 그래서 서로가 자유롭게 놓여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라고 이 시는 되묻고 있다. 나 시인과 함께 산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길을 걸으며 나무 이름과 특징들을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나는 아이가 되어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저녁 '종소리가 들리면 조금씩 아파오는 곳이'〈흔적〉 있다는 그녀의 시를 떠올리며, 단풍을 바라본다. 저 단풍은 어떤 아픔으로 저리 물들었을까. 이 가을, 나는 어떤 멍든 가슴에 함께 울어주는 사랑이 될 수 있을까.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