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겠어. 당신과 함께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 건강한 에로스로 출렁이는 이 말은 우리의 몸과 정신을 자극한다. 전기가 나가 어두워진 방을 상상하는 우리의 몸은 사랑스러워지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당신과 함께라면 기꺼이 가난을 헤쳐가겠다는 사랑의 의지가 몸의 사랑을 완전에 이르게 한다. 사랑의 힘으로 한 땀 한 땀 우리의 낮과 밤을 깁겠노라는 이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비정상적으로 팽배해지는 세상에서 사랑의 갑옷을 입은 현대판 평강공주는 여린 듯 당차다.
이 시는 박라연(57)이 결혼 후 10년쯤 지나 쓴 신혼일기다. 스물일곱에 결혼할 때 남편은 가난했지만 그녀는 쌀이랑 연탄만 안 떨어지면 족하다 생각했다. 그러다 늦깎이로 온달 설화를 소재로 시 쓰기에 매달리던 즈음, 한 친구가 시인의 집을 보러 가자고 했단다. 찾아간 자그마한 시인의 집은 감동적이었다. 넝쿨장미가 활짝 핀 담장 너머 대추나무가 있는 산동네 소박한 시인의 집은 그림처럼 밝았다. 박라연이 매달려있던 시에 부족한 2%를 채워줄 무언가가 벼락처럼 찾아 들었다. 사랑만 있으면 두려운 것이 없던 자신의 신혼살림과 온달 설화와 가난한 산동네를 환하게 하던 시인의 집이 주는 따뜻한 영감이 한 편의 시 속에 어우러졌다. 박라연은 이 시로 그 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 정릉에 있던 그 '시인의 집'이 신경림 시인의 집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 편의 시가 세상에 오는 비밀에 관한 이야기면서, 세상에 와서 무르익는 사랑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없는 것이 많아' 아랫목은 더욱 따뜻하고, 색색의 꽃씨를 모으는 꽃밭이 되느니.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 같은 물질적 가치만 달 줄 아는 '저울'을 버릴 때 사랑의 신화가 시작된다. 그대에겐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을 사랑방'이 있는지? 박라연의 시를 읽고 있으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사랑이 감사한 것은 물론, 누추도 쓸쓸함도 감사하고
싶어질 것이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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