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 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2002년>
어느 독자가 박형준(42) 시인에게 시를 왜 쓰느냐고 물었다. 그가 독자에게 되물었다. 밥은 왜 먹나요? 허기져서 먹는다고 독자가 대답했다. 저는 아름다움에 허기져서 시를 써요…. "내가 말해 놓고도 그 말이 그럴싸했지만 술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점점 멋쩍어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박형준은 어느 산문에서 쓰고 있다. 허기가 적나라한 순간에조차 문종이 위의 살구꽃잎처럼 아스라하게 아름다운 것이 박형준의 시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처럼 적나라한, 참 아뜩한 사랑이다.
수면 아래서 힘겹게 발을 놀리고 있을 오리의 맨발에서 연인의 맨발로 살포시 저녁 빛이 건너온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 시인은 연인의 맨발을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감각적이고 사랑스러운 스킨십인데, 거기엔 아직도 부끄러운 소년시인이 들어있는 듯하다. 그는 연인을 사랑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을 장악하지 않는다. 사랑하므로 연인을 조심조심 바라보고 살포시 따라간다.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연인을 바라본다. 이 사랑의 운명은 그가 아니라 연인에게 달려있다. 흔하게 회자되는 남녀 관계의 줄다리기 같은 것은 여기에 없다. 모든 사랑의 권력을 남김없이 연인에게 드린 이 사랑. 아름답지만 너무 저자세인 거 아냐? 하지만 어쩌랴.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만 예쁜 오리로 헤엄칠 수 있는 걸! 당신의 눈 속이 내 삶터인 걸! 의미를 결론짓지 않고 일부러 열어놓은 마지막 시행으로 인해 사랑은 순환을 시작한다. 사랑에 관한 결론만 빼고, 사랑에 관한 모든 아름답고 섬세한 감각들이 살포시 다시 열린다. 실뱀이 발등을 스쳐가는 그 감각으로.
60년대 후반 가난한 농촌에서 아홉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박형준은 형 누나들을 좇아 인천으로 올라와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가난한 시골이나 도시 변두리에 발목이 잡혀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래서일까. 박형준의 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쓸쓸하고 아름다운 '저녁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아련한 소멸의 감각, 저녁을 닮은 사람들 속에서 미미하게 두근거리는 아침을 예감하는 이것은 그에게 있어 생의 감각이기도 하다. 탄생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갖는 소멸, 이것은 또한 그의 연애의 감각이기도 하다. '空中이라는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 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저곳〉 부분)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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