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인천상륙작전 - "우리가 발로 얻은 정보 갖고 맥아더가 상륙지점 결정"

yellowday 2016. 8. 12. 07:45

입력 : 2016.08.12 03:06

                                                        영화 포스터




[인천상륙작전 성공시킨 '엑스레이 작전' 수행한 노병 김순기]

해안포 위치·북한군 병력 파악
상륙작전 성공한 뒤엔 맥아더 옆에 서서 인천 들어가
해군 창군 70명 중 1명… 1963년 퇴역 뒤 일본 가 생활

90세 청춘 김순기(90)씨가 지난 10일 일본 교토의 자택 앞 텃밭에서 지팡이를 짚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맥아더와 함께 행군하던 1950년 8월이 아닌 “아내와 이렇게 사는 지금”을 꼽았다.
90세 청춘 - 김순기(90)씨가 지난 10일 일본 교토의 자택 앞 텃밭에서 지팡이를 짚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맥아더와 함께 행군하던 1950년 8월이 아닌 “아내와 이렇게 사는 지금”을 꼽았다. /교토=김수혜 특파원

1950년 8월 16일 스물 넘긴 청년 17명이 손톱·발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잘라 군(軍) 사물함에 넣었다. 이틀 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어선을 구해 엿새 걸려 인천 앞바다까지 왔다. 배가 뜨기 전까지 지휘관을 뺀 16명은 어디 가서 뭘 하는지도 몰랐다. 작전명 '엑스레이'. 임박한 연합군 상륙 작전에 앞서 적이 점령한 인천에 침투해 정보를 모으는 임무였다. 8월 24일 새벽 1시 30분 장교 4명과 사병 6명, 군무원 7명이 인천 영흥도 십리포에 몰래 내렸다.

그 뒤 3주간 22세 지휘관 함명수 소령을 도와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24세의 김순기 중위다. 작전이 확정된 뒤

함 소령이 맨 먼저 부른 사람이 전쟁 전 인천경비사령부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던 김 중위였다.

지난 10일 아흔 살 김 중위를 일본 교토에서 만났다. 관객 600만명 돌파를 목전에 둔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그와 연결됐다.

그는 개성 사투리로 간결하게 말했다. "행복한 세상이 오도록 선조들이 고생한 거 알아주면 좋갔어."


그는 "함 소령은 지휘자, 나는 필드 워커(field worker)였다"고 했다. 십리포에 내린 날 밤 김 중위는 인천 시내에 잠입해 전쟁 전부터 술친구로 지냈던 '인천 건달' 권상오씨와 접선했다. 북한군 보안원으로 위장(僞裝)해 부역하고 있었던 권씨가 통행증을 만들어와 대원들의 시내 잠입이 가능해졌다.

그는 "우리가 보낸 정보를 갖고 맥아더 사령부가 정확한 상륙 지점을 결정했다"고 했다. 대원 일부는 월미도 해안도로 보수공사 현장, 방어 진지 구축 공사장에 인부로 들어가 북한군 병력과 장비를 파악했다. 다른 일부는 서울 근교와 안양·서산까지 오가며 주민들 사이에 섞여 북한군 위치와 이동 상황을 알아냈다. 그는 미군 정보장교 유진 클라크 대위와 함께 배를 타고 해안선을 염탐했다. 어느 지점에 해안포가 있는지, 부두 내벽 참호 병력이 몇 명인지, 기관총은 어디 있고 고사포는 몇 문인지 샅샅이 파악해 사령부에 보고했다. 이들은 3주 뒤 철수할 때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다. 17명 중 2명이 전사했다.


적진에서 보낸 숨 막히는 3주간을 돌아보며 '아흔 살 김 중위'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무섭진 않았다"고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 ‘엑스레이’에 투입된 한국 해군 첩보부대의 장학수 대위(이정재 분·뒷줄 맨 왼쪽)와 부대원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 ‘엑스레이’에 투입된 한국 해군 첩보부대의 장학수 대위(이정재 분·뒷줄 맨 왼쪽)와 부대원들. /CJ E&M

그는 전사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얘기를 더 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용사였어. 미간에 총알이 박혀 죽었지.
남은 우리는 상륙 작전이 성공한 뒤 맥아더 장군 옆에 서서 인천에 들어갔어. 그길로 서울 거쳐 압록강까지 올라가다 해군에 복귀했어."

그는 개성에서 태어나 인천 송도중을 졸업하고 1945년 11월 손원일 제독이 세운 '해방병단(海防兵團)'에 들어갔다. 해군 창군 멤버 70명 중 한 명이다.
1963년 중령으로 전역한 뒤에는 배도 타고 무역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인 소개로 만난 일본인 사치코(幸子·68) 여사와 사이에 아들(38) 하나를 뒀다.

전쟁사 학자들은 인천상륙작전이 '기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인천은 갯벌이 넓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 딱 두 시간, 만조에 물이 들 때
상륙해야 하는데 그 사이 적군이 대항하면 우리가 궤멸할 수 있었다."(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기적에 기여한 게 엑스레이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항공사진, 통신 감청 같은 현대 과학기술로도 할 수 없다.
우리 군이 두 발로 뛰는 인 간 정보를 담당했는데, 그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이 김순기 중위였다."(함명수 제독)

그때 목숨을 걸었던 노병들이 그 뒤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디 있는지 우리 정부는 모르고 있다. 지휘관 함 소령을 제외하면 다른 노병의
증언이 나온 것도 이번 인터뷰가 처음이다. 작전 참가자 중 국방부가 이름을 파악한 사람은 10명뿐, 나머지는 '7명'이라는 숫자로만 남았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