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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 전쟁의 아픔과 첫사랑의 풋풋함… 1000년의 흔적을 더듬다

yellowday 2015. 12. 18. 08:03

입력 : 2015.12.17 04:00

강화도 '나들길'


	철종이 강화도 유배 시절 살았던 용흥궁.
철종이 강화도 유배 시절 살았던 용흥궁.
1849년 6월 8일 강화도 초막(草幕)에 살던 19세 청년 이원범은 한양으로 가는 길에 나섰다. 어제까지 농부였던 그는 하루아침에 왕이 됐다.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哲宗· 1849~1863)이다. '강화도령'이라고 불렸던 그 사람이다. 강화유수 정기세는 철종이 살던 초막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용흥궁(龍興宮)이라고 이름 붙였다.

용흥궁은 강화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작은 기와집 4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도라서 궁이라 부르기엔 작은 편이다. 화초도 없고, 밑동만 남은 나무들과 물이 말라버린 우물 2개가 눈에 띄는 마당도 쓸쓸해보였다. 용흥궁으로 개축하기 전 철종이 살던 초막이 얼마나 초라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별전 뒤편으로 꾸며진 정원에 서면 강화군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연잎 떠 있는 수반이나 반짝이는 장독대도 엄숙한 궁이 아니라 시골집 마당 같아 정겹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까지 모두 역모에 휘말려 죽은 뒤 가족이 강화도로 유배됐을 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고아(孤兒)에 역적의 가족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오지로 온 왕족 소년의 심정을 헤아리기란 어렵다. 그래도 용흥궁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과 정겨운 마당이 소년의 마음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몽골에 맞서 싸웠던 최전선 강화산성 북문. 공략하기 어려운 험한 지형이다. 지금은 울창한 숲 사이로 산책로를 만들어 사색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 됐다.
고려시대 몽골에 맞서 싸웠던 최전선 강화산성 북문. 공략하기 어려운 험한 지형이다. 지금은 울창한 숲 사이로 산책로를 만들어 사색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 됐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용흥궁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고려궁지(高麗宮址)가 나온다. 고려 시대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抗戰)했다. 중국부터 유럽까지 세계를 휩쓴 무적의 몽골군에 맞선 고려는 1㎞남짓인 바다를 방벽 삼아 39년을 버텼다.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 군량미를 생산했다. 결국 몽골에 항복하고 환궁하며 이곳에 지어졌던 궁궐도 허물었다. 강화조약 조건이었다. 왕족으로 교육받았던 철종도 이런 역사를 알았을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 이 궁궐터는 행궁(行宮)과 외규장각이었다. 지금은 외규장각 건물과 성문을 열고 닫는 신호를 보내주던 동종(銅鐘) 복제품만이 시간의 흔적을 증거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왕실 문서를 보관하는 조정의 건물이었으니 역적의 가족이었던 철종은 먼발치에서 숨죽여 바라보다 고려궁지와 용흥궁을 둘러싼 강화산성 자락으로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제비꼬리를 닮은 지형에 있는 강화도의 연미정.
제비꼬리를 닮은 지형에 있는 강화도의 연미정.

궁지 뒤편으로 조성된 벚꽃길을 따라가면 산성 북문(北門)이다. 몽골군을 막는 주요 거점이었다. 문을 중심으로 성벽 앞편은 가파른 언덕이라 방어에 유리한 지세다. 북문을 나와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간다. 30분쯤 걸으면 월곶리 마을이 나온다. 마을 끝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앉은 정자가 보인다. 연미정(燕尾亭)이다. 인근 지형이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었다. 강화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항몽 시기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지금도 올라앉으면 북한 개풍 땅이 보인다. 연미정 아래엔 해병대가 주둔 중이다. 인조 때 일어난 정묘호란 당시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역사 현장이다.

또 다른 군사요충지이자 뭍으로 가는 포구였던 갑곶돈대까지 이어지는 해안길은 바다와 육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일품이다. 전시에는 강화도로 침략해오는 병사들의 피로 만들어진 전선(戰線)이었을 터. 지금은 더없이 낭만적인 데이트 코스 같다. 이 길을 걷자니 철종의 첫사랑 이야기가 절로 떠오른다. 14세에 이곳으로 쫓겨 들어온 소년은 봉이(또는 영순이)라는 이름의 소녀에게 마음을 기댔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본디 역적의 가족이자 평범한 농부로 일생을 마칠 운명이었으니 왕족이라도 평민과 맺어지는 데 아무 장벽이 없었을 것. 하지만 운명의 그날 이후 철종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왕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난 철종이 뭍으로 가기 직전 서 있던 곳이 바로 갑곶돈대가 있는 갑곶진이었다. 그곳에 서서 그는 지난 5년간 강화에서의 삶과 기억, 무엇보다 두고 올 수밖에 없는 연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후 철종은 죽을 때까지 강화 땅을 밟지 못했다. 세도정치 속에서 좌절한 채 요절한 철종이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곳이 바로 이 갑곶진에서 바라본 강화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말 없는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철종과 봉이의 가장 행복했을 시절을 생각했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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