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을 봤을 때 그곳에 얽힌 정암 조광조 선생과 학포 양팽손 선생, 양 선생의 일족인 소쇄공 양산보 선생 세 부자(父子)가 얽힌 소쇄원 건설 과정을 흥미롭게 취재한 바 있습니다.
- 호남의 3대 원림으로 꼽히는 소쇄원의 풍경이 그림같다.
이 독수정이라는 정자와 그 일대의 원림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건설자는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입니다. 그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고려 공민왕 때 북도 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14세기 중반에 태어나 15세기 초반에 숨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때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때였지요. 망국(亡國)의 한을 품은 전신민은 조선 태조의 부름을 받지않고 머나먼 남도 땅으로 은거해버렸습니다.
독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며 마루에 앉으면 무등산이 보입니다.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며 정자 앞에 작은 연못을 만듭니다. 전신민은 거기서 낚시하며 세월을 낚았지요. 독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의 시선 이백의 싯구에 등장합니다.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죽었네(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 특이한 것은 이 정자가 보통 정자처럼 남향이 아니라 북향(北向)했다는 것입니다. 모시던 왕이 있던 개성쪽을 향해 날마다 울며 절하기 위해 그리 정했지요.
- 독수정은 특이하게도 북향이다. 쓰러져가는 고려를 위해 매일 아침 절하는 늙은 충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 고려말 충신 전신민이 조성한 독수정원림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風塵漠漠我思長 (풍진막막아사장-바람과 티끌은 막막하고 나의 생각은 갈수록 깊어지네)
何處雲林寄老蒼 (하처운림기노창-어느 깊숙한 구름과 숲 사이로 이 늙은 한몸을 숨길 수 있으랴)
千里江湖雙鬢雪 (천리강호쌍빈설-임금 계신 곳 천리밖의 자연에서 두 귀밑버리는 눈처럼 희어지고)
百年天地一悲凉 (백년천지일비량-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인생살이 슬프고 처량하다)
王孫芳草傷春恨 (왕손방초상춘한-아름다운 풀과 꽃들은 가는 봄을 가슴아파하고)
帝子花枝叫月光 (제자화지규월광-두견새는 꽃가지에 앉아 달을 보고 우는구나)
卽此靑山可埋骨 (즉차청산가매골-이곳 청산에 뼈를 묻으려고)
誓將獨守結爲堂 (서장독수결위당-장차 홀로 절개를 지키려 이 집을 지었다네)
- 임대정원림은 숨은 보석같다. 평범한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화려한 경관의 연못이 등장한다.
어떻습니까, 요즘 보기힘든 선비들의 기개와 충절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얼마전 세상 뜬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상도동계-동교동계가 스러지는 것을 보고도 진박(眞朴)이니 복박(復朴)이니 하고 다투는 사람들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지요. 독수정원림을 등지고 담양 시내쪽으로 향하면 오른쪽으로는 소쇄원과 식영정, 건너편으로는 환벽당과 취가정과 죽림재가 나옵니다. 그야말로 세계에 자랑할 명승가도(名勝街道), 몇번을 가보아도 질리지않는 우리 옛 정자들이 잘 보존된 곳입니다.
이렇게 달리다보면 고속도로가 정면에 보이는데 거기서 우회전에 약 3분을 달리면 명옥헌(鳴玉軒)원림이 나옵니다. 명옥헌은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에 아들 오이정(吳以井:1619∼1655)이 정자를 짓고 주변을 가꾼 곳이지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명옥헌에 오르기전 방문객들은 환성을 자아낼 수 밖에 없습니다. 입구에 커다란 연못이 있으며 여름에서 가을까지 배롱나무가 화려한 자취를 뽐내는 곳입니다. 배롱나무는 선비들의 거처에 많은데 다른 이야기도 있지요.
배롱나무는 일명 백일홍이라고도 합니다. 백일 붉기위해 이꽃은 여러 번 허물을 벗는데 그것이 예전에는 여인들이 치마를 벗는 것에 비유됐다는군요. 치마를 벗으면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었기에 집 주변에 배롱나무를 심지않는다는 것입니다.
연못길을 따라 올라가면 명옥헌이 보이고 뒤에는 이 고장의 유명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연못이 네모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세상이 네모라고 여겨 연못도 네모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바람소리가 맑아서 소쇄원이라는 이름이 생겼듯 명옥헌은 구슬이 우는 것처럼 정자 주변을 흐르는 작은 시내의 물소리가 구슬이 부딪쳐 나는 소리와 같아 생겼다고 하지요. 명옥헌의 오른편에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300년 이상된 늙은 나무인데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떠돌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말을 매어둔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달리는 후산리 은행나무로도 불립니다. 명옥헌 원림은 소쇄원과 함께 명승 제58호로 지정됐습니다. 그렇다면 오희도는 어떤 인물일까요. 본관이 나주(羅州)인 그는 명곡(明谷)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1602년(선조 35)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4년(광해군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정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효성이 매우 지극한 인물로 알려졌는데 안타깝게도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는 사관을 대신해 어전에서 임금이 하는 말을 기록하다 능력을 인정받아 예문관 검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간 그해 천연두에 걸려 마흔한살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요. 그의 아들 오이정은 1639년(인조 17) 사마양과(司馬兩科)에 합격하고 1650년(효종 1) 태학(太學)에 들어가 이듬해 정시(庭試)에서 낙방하자 곧바로 낙향했습니다.
그는 학문이 깊고 기예에 능했는데 특히 거문고가 사악한 생각을 금한다고 해 좋아했습니다. 그 역시 병에 걸려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中편에 계속>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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