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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調歌頭 (수조가두) - 소동파

yellowday 2015. 8. 9. 14:40

水調歌頭 (수조가두) - 소동파

 

 

明月幾時有(명월기시유)             밝은 달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把酒問靑天(파주문청천)             술잔을 들고 하늘에 물어본다.
不知天上宮闕(부지천상궁궐)         하늘의 궁전에서도 모를 것이다.
今夕是何年(금석시하년)             오늘 밤이 어느 해에 속 하는가.
我欲乘風歸去(아욕승풍귀거)         바람 타고 하늘 궁궐 돌아가고 싶지만
又恐瓊樓玉宇(우공경루옥우)         경루에 선경도 두렵기만 하고
高處不勝寒(고처불승한)             저 높은 곳 추울까 두려워라
起舞弄淸影(기무롱청영)             일어나 춤추며 그림자와 노나니.
何似在人間(하사재인간)             인간세상에 어찌 이런 곳 있으랴
轉朱閣低綺戶(전주각저기호)         붉은 누각 돌아 비단 문에 내렸으니
照無眠(조무면)                      달빛에 잠을 이룰 수 없네
不應有恨(불응유한)                 달님은 나하고 원한도 없을 터인데
何事長向別時圓(하사장향별시원)     어이하여 이별할 땐 둥글어 지는가.
人有悲歡離合(인유비환이합)          사람에겐 기쁨과 슬픔이 있고
月有陰晴圓缺(월유음청원결)          달은 밝고 어둡고 둥글고 이지러짐 있으니
此事古難全(차사고난전)               이런 일은 자고로 완전하기 어려워라
但願人長久(단원인장구)               내 다만 바라는 건 오직 오래도록
千里共嬋娟(천리공선연)             천리밖에서 저 고운 달빛을 함께 보고픈 것이라네.

 



*지은이:소식(蘇軾,1037년,인종 조정 경우4년~1101년,휘종 조길,건중정국 원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생애
송나라 때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이었고, 
그 아우도 소철(蘇轍)로 유명한 문인이다. 이 세 부자를 사람들은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혔다.

당송8대가의 하나인 구양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22세에 과거에 급제 일찌감치 문재를 알렸다. 
당시 북송(北宋)은 왕안석 등이 주창한 신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확산될 시기였는데,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를 구법당이라 하며, 구법당의 영수는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1079년에는 황주(호북성)으로 유배를 갔지만 낙천적인 성격으로 6년간의 유배 생활을 무사히 끝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한림학사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1094년 다시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혜주(광동성)으로 유배되었고 
3년 후인 1097년 중국 최남단인 해남도까지 귀양을 갔다. 당시 해남도는 주민 대부분이 소수민족인 여족으로 이루어진 
미개척 섬이었고 소동파는 셋째아들 소과만을 데리고 갔다. 해남도에서도 소동파는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해 주민들의 
인망을 얻었고 중앙의 명을 받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해남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두막을 지어 살 수 있었다.
이후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조후,신종황제의 6남)이 죽고 복권되었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남경에서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번 결혼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항저우, 밀주, 서주, 호주 등에서 벼슬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