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가두(水調歌頭, 水调歌头) / 장혜언 (張惠言, 1761~1802)
今日非昨日, 明日復何如。(금일비작일, 명일부하여)
朅來眞悔何事, 不讀十年書。(걸래진회하사, 부독십년서)
爲問東風吹老, 幾度楓江蘭徑, 千里轉平蕪。(위문동풍취로, 기도풍강난경, 천리전평무)
寂寞斜陽外, 渺渺正愁予。(적막사양외, 묘묘정수여) (상편: 1절)
오늘은 어제가 아닌데
내일은 또 어떠할까?
지금껏 어떤 것을 후회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니
십 년 동안 독서하지 않은 것이라네.
물어보니 봄바람은
몇 차례나 강가의 단풍과 길에 핀 난초를 시들게 했다 하는데
천 리까지 평평히 잡초가 무성하네.
적막한 저 석양의 밖이
아득하여 나를 수심에 잠기게 하네.
千古意, 君知否。(천고의, 군지부)
只斯須。(지사수)
名山料理身後, 也算古人愚。(명산요리신후, 야산고인우)
一夜庭前綠遍, 三月雨中紅透, 天地入吾廬。(일야정전녹편, 삼월우중홍투, 천지입오려)
容易衆芳歇, 莫聽子規呼。(용이중방헐, 막청자규호) (하편: 2절)
천고의 뜻을
그대는 아는가?
단지 잠시일 뿐이라네.
명산에서 사후를 보내려는 생각에는
고인도 어리석다 할 것이네.
하룻밤 사이에 뜰 앞은 녹음이 퍼지고
삼월의 빗속에서 붉은 꽃이 만발하니
하늘과 땅이 내 거처로 들어와 있네.
쉽사리 많은 꽃이 다 저버리자
두견새 소리를 들을 수가 없네.
작품해설
이 작품의 형식은 사이기 때문에 「수조가두」는 작품의 제목이 아니다. 따라서 작품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수조가두」는 악보에 해당하는 사패(詞牌) 또는 사조(詞調)이다. 사패인 「수조가두」는 「원회곡(元會曲)」·「개가(凱歌)」·「강남호(江南好)」·「화범염노(花犯念奴)」라는 별칭이 있다. 「수조가두」는 여러 체재가 있는데 모두 쌍조(雙調)이다. 장혜언의 「수조가두」는 삶에 대한 책임과 자책을 표현하고 있다.
민간에서 출발하여 송(宋) 대에 그 번성을 구가했던 사는 남송(南宋) 말기에 이르러 엄격한 음률 규제와 지나친 어구조탁으로 대중에게서 멀어진 문인들의 전유 양식이 되었다. 따라서 원(元) 대에는 사라는 문학 형식이 급속히 몰락하였다. 원 대 이후에도 극히 일부의 문인들이 사의 창작을 지속하였지만, 작가로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특히 원 대 이후로는 새로운 가창문학인 산곡(散曲)이 유행하면서 사의 악곡이나 창법은 실전되었다.
그러나 청 대가 되어 고증학적인 학술 기운이 도래하면서 사에 대한 관심이 재차 높아지게 되고, 이에 사는 부흥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청 대의 사는 송 대의 사와는 달리, 음악과는 분리된 양식으로 사보(詞譜)에 따라 전사(塡詞)에 그칠 뿐, 이미 그 생기를 상실한 문학이 되었다. 청 대에 사를 지은 작가들은 실제로 사를 창작함과 동시에 사 관련 이론과 평론도 발전시켰다. 이 때문에 많은 사인(詞人)이 작품과 함께 사화(詞話)·사선(詞選) 등의 편저를 남기고 있다.
순치(順治)부터 강희(康熙)에 이르는 청 대 초기에는 오위업(吳偉業)·조용(曹溶)·왕사정(王士禎)·팽손휼(彭孫遹)·고정관(顧貞觀)·모기령(毛奇齡) 등이 사를 창작하였는데, 이들 사의 풍격은 대체로 명(明) 대 말기의 유풍을 계승하여 온유하고 화려한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청 대 초기에 사작(詞作)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우수 작가는 바로 납란성덕(納蘭性德)이다. 납란성덕은 사를 통해 변방의 풍경을 훌륭하게 묘사했는데, 사가(詞家)들은 그의 애절하고 다정한 작품들에 대해 호평하고 있다.
청 대 중기에 이르러 사는 그 유파를 구분하면서 더욱 발전하는데, 절서파(浙西派)·양선파(陽羨派)·상주파(常州派)가 그것이다. 절서파는 남송(南宋)의 강기(姜夔)와 장염(張炎)을 모범으로 간주하여 남송 사의 풍격을 고취하였는데, 주이존(朱彝尊)과 여악(厲鶚) 등이 절서파에 속하는 사인들이다. 양선파는 소식(蘇軾)과 신기질(辛棄疾)의 사풍을 본받아 호방한 풍격의 사를 지었다. 진유숭(陳維崧)은 양선파의 선구이자 대표이다. 이후 절서파와 양선파는 각각 폐단이 심각해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절서파는 시간이 갈수록 기교만을 추구하여 난삽해졌고, 양선파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기만 할 뿐 침울한 기세가 사라졌다. 결국 양측 모두 모방과 답습에 정체되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지 못하는 한계에 이르렀다.
그러자 가경(嘉慶, 1796~1820) 시기에 장혜언이 출현하여 상주파를 형성하였다. 장혜언은 사의 의미를 중시하고 격률을 경시하며, 사를 창작하는 데에서 화려한 수식보다는 작자의 솔직한 생각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창하였다. 또한 작가의 진정성을 표출하기 위해서는 은유나 상징의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 내용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사랑과 애정을 노래할 때도 『시경(詩經)』이나 초사(楚辭)에서처럼 비유적인 표현으로 기탁되어 있어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장혜언은 북송(北宋) 시기의 사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특히 주방언(周邦彦)의 풍격을 표본으로 삼았다.
결국 사는 반드시 함축된 의미를 내포해야 하며, 그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는 은유의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게 장혜언이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이다. 그는 주방언을 숭상하고 강기와 장염을 저평가하였으며, 소식과 신기질에 대해서도 그 공을 폄하하였다. 그러나 장혜언은 그의 작품이 자신이 제창한 이론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수조가두」 역시 그의 주장으로부터 이탈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의 기탁이나 비유도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나태와 빠른 세월의 흐름에 대한 감회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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