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古詩 漢詩

춘망사 (春望詞) - 설도

yellowday 2015. 1. 12. 23:21
 


◆  春望詞  춘망사  (봄 날의 바램) ◆  


                                                                         - 薛濤  (설도) -      

其一

花開不同賞    화개불동상   꽃 피어도 같이 즐길이 없고
花落不同悲    화락불동비   꽃이 져도 함께  슬퍼 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    욕문상사처   그리운 이 어데 있나 묻고저 한데,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때 맞추어 꽃들만이 피고 지는구나.  
                

其二

攬草結同心    남초결동심   풀닢 뜯어 같은 마음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    장이유지음   내 님에게 보내려고 마음 먹는데,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   봄 시름은 속절없이 끊겨 버리고,
春鳥復哀吟    춘조부애음   봄 새들이  다시 와서 애달피 우네  
                

其三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바람결에 꽃잎들은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맺어질 날 아득히 멀어만 가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그대와는 한마음을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부질없이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춘망사 (春望詞) - 설도
其四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   어찌하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煩作兩相思    번작량상사   괴로워라 서로 서로 그리운 것을,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   아침 거울 흘러내린 옥같은 눈물
春風知不知    춘풍지불지   봄바람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 설도 (薛濤)에 관하여 -

우리나라에 여류시인으로서 "황진이"가 있다면 중국에는 당나라때에 기녀로서 여류시인 설도(薛濤 790 - 832)가 있었다.

설도의 자는 공도(洪度) 어렸을적 부터 시,문에 재능이 뛰어났었다. 설도는 실연한 사연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  도교의 사제로 불리웠다. 그녀는 명문가의  후예였는데 선조는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의 유명한 명장으로서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설인귀(薛仁貴)라고 전해온다.

그녀의 생몰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두보가 죽은 해에 그녀의 나이는 서 너 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는 장안(長安) 출생이었지만, 사천성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부친은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하게 되고, 곧 이어 모친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결국 악기(樂妓-기예(技藝)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 기녀)가 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보기 드문 재녀(才女)였는데, 음률과 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녀에 얽힌 전설 같은 사랑이야기도 유명하다.


그 당시 사천절도사 위고라는 사람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이라는 직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예가 없다며 반대하는 부하들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일류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들은 백거이(白居易),

원진(元鎭),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이라고  전해온다.

특히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합니다. 원진은 장래가 촉망되는 당대의 시인으로서 사천감찰어사로서 성도에 오게 되었

는데, 설도는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연하인 원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아내가 있었던 원진(元鎭)은 설도와

며칠을 함께 지낸 후, 배를 타고 떠난 후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설도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원진은 원래, 부친을 일찍 여윈 명문가의 미녀 최앵앵(崔鶯鶯)과 혼약을 정했으나 배신을

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원진 스스로 쓴 당대의 유명한  소설 앵앵전(鶯鶯傳)에 실려있는데, 앵앵전은 훗날

서상기(西廂記)라는 희곡의 주제가 되었고, 또  서상기는 우리나라의 춘향전(春香傳)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원진은 또,

당시 절강성 소흥의  유명한 명기였던 유채춘이라는 여자를 농락하여 자살토록 한 바도  있었으며, 그러고도 결국 재상의 딸과

결혼하여 출세한 인물인데 그러고도 설도를 만나 장래를 약속했다. 설도는 원진에 대한 그런 좋지 못한 그런 소문을 전해  

듣고는 결국 그를 단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녀는 머리도 몹시 영리하여 설도전(薛濤箋)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종이도 발명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은 백지(白紙)에  시를 써서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불길하다고  여겨
색깔있는 시전(詩箋-시 한 수나 간단한 사연을 쓰는 폭이 좁은 종이)이 성행했는데 설도는 완화계의 자신의 집 근처의

종이 공장들을 늘 살펴보고 연구하고는, 꽃물을 넣은 붉은 색의 아름다운 색종이를 만들어 자신의 시를 적어 사람들에게

보내곤 하였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몹시 청신하면서도 아름다워 설도전이라고 이름짓고 다투어 수장하려고 하여

몹시 귀하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황실에서도 사들이는 진품(珍品)이 되었다고 한다.

시성(詩聖) 두보는 만년에 성도의 서쪽 교외에 있는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옆에 초당(草堂)을 짓고

살다가 죽었는데, 설도도 만년에 그 근처로 와서 음시루(吟詩樓)라는 집을 짓고 살았으며, 집에는 항상 창포(菖蒲) 꽃과

대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청(淸)대에 이르러 설도의 슬픈 사랑과 넋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살던 곳에  망강루(望江樓)라는 누각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했던  대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에 가면, 그녀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었다는 설도정(薛濤井), 설도전을 만든 현장인 완전정(浣箋亭), 그 다락에 기대어 시를 짓고 설도전에 옮겼다는  

강변의 음시루(吟詩樓) 초석이 있으며 그녀의  시(詩)에 자주나오는 대나무 1백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녀는 생전에 500여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88 수만 전해지고 있다.

우리 가곡인 동심초는 그녀의 시 춘망사(春望詞) 4 수  중, 세 번 째 수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조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