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강둑길] 함경북도 두만강
- 글·사진 조용연(여행작가, 前 울산지방경찰청장)
동해물과 백두산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물길 두만강은 없다. 태극기도 애국가도 없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그저 흘러간 옛 노래의 제목이다. 중국 땅에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저 강은 그저 도문강(圖們江)일 뿐이다. 그러나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정기가 녹아 흐르기에 두만강을 가슴으로 안는다. 고구려의 기상과 발해의 자존을 일깨우는 두만강 천리길을 자전거로 달려볼 그날을 꿈꾼다. 지금은 그저 차창에 기대어 북녘 땅을 하염없이 바라만 볼 뿐이다.
북한과 중국 사이의 묘한 긴장은 국경으로 먼저 다가오나 보다. 그저 자연하천 모습 그대로 이던 두만강에 철조망이 쳐진 것도 최근 1~2년 사이의 일이다. 오래 전부터 꿈꾸던 ‘두만강 자전거 종주’는 아직 조금 이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인 K는 내 꿈을 이해했다. 이틀에 걸쳐서 두만강 변을 최대한 자동차로나마 미리 달려 보기로 했다.
두만강도, 푸른 물도, 뱃사공도 없다
- ▲북한군 병사가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나가고 있다. 대홍단군 삼장리.
후배 박윤순 사장과 자전거생활 김병훈 대표가 동행하고 현지인 K가 안내했다. 비가 온 뒤라지만 두만강은 푸르지 않다. 남의 나라 땅에서 우리 땅을 구경하듯 지나가야 하는 비애는 무겁다.
먼저 동해(東海)와 면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3국 접경지로 간다. 두만강의 하구다. 천리가 넘는 길을 중국의 지명만 소개해서는 감이 안 잡히니 강 건너 북한의 땅이름을 대칭하면서 가야 그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그래야 ‘한국의 강둑길, 두만강’이 좀 체면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지명은 중국발음이 아니라 연변조선족의 한글표기 방식대로 적는다.
동해를 눈앞에 두고 가로 막힌 중국
- ▲중국쪽 호암령에서 내려다본 함경북도 무산시, 60년대에서 정지된 듯 적막감이 슬프다.
연길을 떠나 도문, 훈춘을 지날 때까지만 해도 멀찌감치 있던 두만강이 경신진(敬信鎭) 권하(圈河) 세관에 이르자 성큼 다가왔다. 북한의 나진선봉시 원정리와 다리로 이어진다. 7개에 달하는 두만강 위의 세관, 이른바 조·중통상구 중 가장 하구 쪽에 있다. 마침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막 북한으로부터 입국하여 차에 타려던 참이다. 그들의 주거래 품목은 해산물인데, 손에 들고 온 것은 낙지와 보따리 몇 개다.
중국 땅은 동쪽 끄트머리까지 지네처럼 길게 이어진다. 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중국의 집념은 두만강을 따라 바짝 붙여 길을 내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좁은 곳은 폭이 채 100m도 안 되는 호리병 목을 러시아, 중국, 북한이 나란히 간다. 중·러 국경선이 구불구불 제멋대로 간데 대해 지인 K가 우스개를 부린다. “청나라 때 국경선을 긋기 위해 실사 나온 러시아와 청나라 병사들이 거나하게 한잔하고 국경선을 긋는 바람에 그만 삐뚤빼뚤 해지고 말았대요.”
국경의 종점 방천풍경구(防川風景區)에 ‘토자패(土字牌)’가 있다. 여기까지가 중·러의 국경이라는 글자가 적힌 비석이다. 세월을 못 견딘 글씨는 희미하다. 분단의 익숙한 상징인 임진강 습지를 보고 살아온 탓일까, 철조망이 있는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본격적인 관광을 위한 정비공사가 한창이다. 바다안개 낀 동해를 먼 배경으로 13층 높이의 전망대 ‘용호각’이 서있다. 눈앞에 북한의 두만강역과 러시아의 핫산을 연결하는 ‘북·러 친선교’가 보인다. 중국에게야 천추의 한이겠지만 러시아와 한반도가 중국의 길목을 가로막고 나선 형세다. 저기서 18㎞를 가면 동해 푸른 물이다. 중국이 화가 나서일까, 중국지도는 일본해(日本海)라고 적고 있다.
1952년 완공된 650m의 이 철교는 5년간의 대보수 끝에 2013년 9월 22일에 개통했다. 라진선봉으로 가는 국경화물열차가 주인이다. 이나마도 그냥 지켜진 게 아니다. 멀리는 4군6진을 설치하여 여진을 밀어내고, 성웅 이순신은 조산만호(造山萬戶)로서 이 먼 북방의 변경을 지켰다. 그러고 보면 이순신은 명실 공히 최북단 녹둔도(鹿屯島, 두만강 하구의 섬)와 남쪽의 우수영을 모두 지킨 위대한 해군제독이다. 허나 허약한 조선은 1860년(철종11년)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강제로 넘겨버려 ‘사슴의 섬 녹둔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섬 녹둔도도 우리 지도에서 사라져 해무 속에 아득할 뿐이다.
밀강(密江) 그리고 량수(凉水)의 끊어진 다리(凉水斷橋; 온성대교)
- ▲러시아, 북한, 중국 3국의 국경이 맞닿은 동쪽 끝 용호각 전망대에서. 멀리 북·러친선교가 보이고 그 너머가 동해바다이다.
훈춘과 도문 사이에 밀강진과 량수진이라는 소읍이 있다(鎭은 우리나라 면 정도의 행정단위). 북한의 미산(美山)과 접하고 있는 밀강은 조선족이 80%가 넘는 우리의 고토다. 밀(密)자가 주는 그 내밀함이 습하고 절박하다. 파인(巴人) 김동환의 ‘국경의 밤’ 배경에 딱 들어맞는 마을 이름 아니겠는가. 3부 72장에 이르는 대서사시의 배경은 천리물길 어디를 아우르지 않았을까마는 밀강이 합류하는 겨울 두만강이 최적이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 이 한밤에 남편은 /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그의 시어들을 다시 읽어본다. 강안경비, 외투 쓴 검은 순사, 소금실이 밀수출마차, 파~하고 붙은 어유등잔, 영림창, 벌부 떼 소리, 어~이 히 부르는 군호,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
밀강 옆 량수(凉水)에 있는 끊어진 다리에 들른다. 중국에서는 량수단교라고 부르는 온성대교다. 함경북도 온성군 구청리와 도문시 량수진을 연결하는 중요교량(525m, 폭 6m, 1937년 완공)이라 1945년 패전하여 퇴각하던 일본이 소련의 진격을 막기 위해 폭파했다. 그대로 70년이 흘렀다. 2007년에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교편을 잡고 있던 리기화 씨가 다리 옆에 4층 건물을 짓고 역사공원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키고 있으나 썰렁하다. 다리 아래에는 온성도라는 하중도(강속의 섬)가 있는데 물길이 바뀌면서 중국과 북한의 다툼이 있자, 섬 한가운데 백양나무를 일렬로 심어 국경으로 정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배를 타고 건너와 농사를 짓고 돌아가곤 한단다. 이 다리는 속초항을 출발해 백두산관광을 하는 4박5일 코스 중간에 들어있다.
연길의 한강, 부르하통 강
- ▲①중국이 바다로 나가고자 하는 열망은 식지 않는다. ②권하 국경세관 근처. 멀리 북한으로 건너가는 중국의 마지막 다리가 보인다. ③백산호텔에서 본 연길 부르하통강의 야경.
연길시내에 들어서면 시원스런 강이 흐른다. 부르하통강(布鬱哈通江)이다. 일명 ‘불알통’ 강으로 부른다. 듣고 웃으면 조선족이고, 멍하면 한족이다. 야경은 화려하다 못해 오색의 향연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온통 도시가 환락의 네온처럼 강물 위에 출렁거린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건주60년을 지난해 보낸 연길은 몰라보게 깨끗하고 단정해 보인다.
다음날 아침 강변은 태극권을 단련하는 사람들과 남녀의 댄스로 하루를 연다. 우리 눈으로는 좀 흉할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마도 사회주의 집단율동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한다. 어쨌거나 서울에서 건너온 트로트메들리의 선율이 경쾌하다. 해란강(海蘭江)도 부르하통강도 모두 도문(圖們)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주 정부를 비롯하여 심각한 강의 오염을 걱정하는 것은 한국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생활하수에 축산폐수가 더해지고, 무산철광의 폐수까지 흐르는 두만강이 푸르지 않은 것은 아직은 당연한 듯하다.
조선족 윤동주의 생가, 명동(明東)
- ▲(사진 위쪽)1945년 일본군이 패전하여 후퇴하면서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폭파한 량수대교(온성대교), 폭파 당시 모습 그대로다. (사진 아래쪽) 태극권 단련으로 아침을 여는 연길시민들.
두만강 도문에서 백금까지 150㎞는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북한의 남양시와 접하고 있는 도문은 연길에서 지척이기 때문이다. 오늘 두만강을 따라 백두산까지는 250㎞가 넘는 먼 길이다. 게다가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들렀다 가는 것이 연변에 온 보람이다.
용정 명동에 그의 생가터가 있다. 할아버지 윤하현이 1900년에 이주해서 살던 곳에 복원한 것이다. 무엇보다 정문에서 맞는 비석 하나가 놀랍다.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민족의 시인이 우리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조선족이라! 중국은 애써 그를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족’의 호적에 넣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희생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백조의 시 한편에서 그는 증조부와 조부가 태어난 함경북도 종성을 그리워하는 한국 사람임을 증명한다.
헌 짚신짝 끄을고 / 나 여기 왜 왔노 / 두만강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 남쪽 하늘 저 밑엔 /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 그리운 고향집
(<고향집> 전문, 1936)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중국어로 번역한 시비가 늘어서 있고, 모아산에서 2원이면 올 수 있는 버스의 종점이 여기 윤동주의 생가마을 명동이다. 막 모내기를 끝내놓고 단오놀이를 나온 조선족들이 생가 뜰에 시끌벅적하다. 윷놀이와 2인3각 달리기로 웃음꽃을 피우자 적막하던 생가는 조선의 ‘노세 노세’ DNA가 살아난 듯 생기가 돈다.
아, 다시 두만강이다, 백금향(白金鄕)과 남평진(南坪鎭)
- ▲①윤동주 생가, ‘조선족애국시인’이란 표현이 우리에겐 낯설다. ② 조선족들이 단오를 맞아 윤동주시인 생가 마당에서 윷놀이를 즐기고 있다. ③ 손님이 많으면 통로에 앉히려고 나무의자를 싣고 다니는 모아산행 연변버스.
백금으로 가는 길은 온통 울창한 수림, 그 길섶에 몇 채의 집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천불지산(千佛指山)자연보호지구다. 그다지 높지 않은 고도, 완만한 다운힐을 즐길 수 있는 코스다. 도문, 월청(月晴), 개산둔(開山屯), 삼합(三合)을 거쳐 상류로 가는 두만강 변 마을 백금에 잠시 쉰다. 북한에서 보면 남양, 종성, 회령이 각기 대칭점이다. 강폭은 100여m로 좁혀진다.
막 공사가 끝난 듯 시멘트 포장길엔 횟가루가 날아다닌다. “2년 전만해도 철조망이 없었지요.” K는 아쉽다는 표정이다. 중국은 대량 탈북 등을 고려하여 다급하게 철조망을 친듯하다. 차는 속력을 내서 두만강을 따라 간다. 약간은 경색된 북·중 관계는 철조망이 주는 긴장으로 일행을 압박한다.
강안을 따라 펼쳐진 퇴적의 공간에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산비알로 올라간 밭들은 4각의 도형을 그리며 개간되고, 때론 기계충 먹은 뒤통수처럼 희뿌옇게 죽어 있다. 남평진에는 국경세관이 설치되어 있고, 중국의 자본가가 북한의 철광을 실어가기 위해 일부러 건설했다는 철도가 강변까지 나있으나, 진도가 여의치 않다는 얘기만 돈다.
북의 슬픈 자화상, 흑백의 도시 무산(茂山)
- ▲(사진 위쪽)무산시내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일(一)자형 가옥. 60년대 그대로다. (사진 아래쪽)숭선 건너편 대홍단 삼장리 북한 군인들이 땔감을 해서 지고가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관광객들은 도문에서 남양으로 건너가는 다리 중간에서 살짝 북한의 냄새만 맡고 돌아오지만, 두만강 천리길의 압권은 호암령(虎岩嶺)에서 내려다 본 북한의 무산시다. 흑백의 화면, 그 충격은 60년대의 정지화면으로 돌아간다. 산천이 푸르른 6월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퇴행의 도시에 더 가슴이 저렸을 것이다. 중국 안내판이 설명한다. 아시아 최대의 노천철광이 보이는 호암령이야말로 두만강에서 유일무이한 전망대라고…. 두만강 가에는 빨래하고, 몸을 씻는 사람들이 보인다.
K는 말한다. “저기 목재공장은 40년 전 그때나 이제나 똑 같네요.” 무산지역의 풍부한 목재를 두만강 뗏목으로 띄우거나, 철도로 실어 나르는 기점이었다. 백무선(白茂線) 기차가 성천수(城川水) 강가를 따라 내륙으로 깊이 파고든다. 낭만과 향수로 본다면 함경북도 백암에서 무산에 이르는 192㎞의 백무선 철길은 깊고 깊은 삼림철도다. 스위치백 철도가 있는 협궤열차는 증기를 뿜으며 지금도 달리고 있을까. 한반도 제2의 관모봉(2540m)이 지척인 태산준령에는 심심찮게 벼랑으로 구르는 열차사고가 난다는데, 그 철길은 얼마나 가파를까. 멀리 산 너머 마을이 한스럽도록 그립다. 글을 쓰며 다시 듣는 가요사의 명인 진방남의 노래, ‘눈 오는 백무선’이 LP판 유성기에서 서럽다. ‘남포불 절름긴 창에 이마를 대고 백무선 아득한 길에 누굴 찾아 가는 거냐 오는 거냐’. 망향의 탄식은 일본 엔카의 고전 ‘키타쿠니노 하루(北國の春)’보다 더 절절하다.
또 하나의 시가 있다. 눈 내리는 북국 무산의 향수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가 없다. 내가 공부하던 시대에는 금기의 목록에 들어있던 월북시인 이용악의 ‘그리움’이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이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유랑의 서러운 심정과 가족과의 이산, 그 향수와 탄식이 넘친다. 눈 때문에 처가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경성(서울)에 살던 시인의 애절한 연가다.
60년대 전기가 들어 온 산골, 노과향(蘆果鄕)
- ▲두만강 목재를 뗏목으로 나르던 공장과 멀리 성천수 위 다리, 무산노천철광 등이 보인다.
고향 노과를 지나며 K는 벼랑 위에서 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수풀 속으로 안내한다. 수직의 벼랑이 100m는 족히 될 듯한 숨겨진 보물이다. 관광국 사람들도 잘 모른다는 비경은 어릴 적 그의 놀이터였다. 강변에 갈대가 많아 ‘갈대 노(蘆)’자를 쓰는 노과는 전형적인 벽촌의 국경마을이었다. 방물장수나 가설극장의 기억도 여느 산골과 마찬가지였지만 전기만은 일찍이 들어와 저녁은 밝았단다. 북한이 중국보다 잘 살았던 60~70년대, 풍부한 수력을 가진 북한은 전기를 송전하면서 땅이 펑퍼짐한 중국 쪽 국경에다 전봇대를 심는 대신 전기를 이 마을에 공급해 주었다.
K가 들려주는 무산 보안서의 기억은 섬뜩하나 한편의 만화 같다. 무산에서 시오리 남짓한 노과에 살던 그가 두만강변에서 놀던 중 북한군 병사들이 다가와 꼬드겼단다. “북으로 오면 더 잘 먹고 살 수 있다”고. 15살 소년이지만 북의 유혹을 거절하자, 국경을 넘었다는 이유로 무산 보안서에 잡혀 갔단다. 그때야 변경은 자유롭진 않았어도 서로 내왕하던 때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아는 사람을 만나 김정일 뱃지 하나 얻고 돌아온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그네만 긴장하는 국경 마을, 숭선진(崇善鎭)
- ▲①두만강 물에 손을 담그며 감회에 젖는다. ② 숭선 고성촌은 조선족의 집단 취락지이다. 뒤편 군함산이 자연성벽을 이룬다. ③ 노과 근처의 두만강 직벽단애, 수직 100m가 넘는 협곡이다.
노과에서 34㎞ 떨어진 숭선은 백두산 아래 첫 두만강 국경 소읍이다. 눈짐작으로도 100호나 될까 말까한 마을이나 양강도 대홍단군 삼장리로 이어지는 국경세관이 있다. 두만강의 첫 다리가 이 마을에 있다. 국경을 빈틈없이 싸고 있던 철조망이 이 마을에는 없다. 숭선 사람들도 두만강 물을 이용하고, 고기도 잡기 때문일 게다. 강가에도 긴장된 구석이 없다. 북한군 병사들도 나무를 해서 메고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나가는 모습이 30m도 채 안될 강 저편 풍경이다. 우리가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 그저 우리만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숭선의 뒷벽은 거대한 성채 같은 군함산이 막아주고 있다. 흡사 군함의 앞머리 같다. 옛 성곽에도 조예가 깊은 김병훈 대표가 “틀림없이 이 마을이 고성리(古城里)인 것은 군함산이 천혜의 자연성벽이기 때문일 겁니다. 고구려 졸본성도 그랬고, 구미의 천생산성이 딱 이 모양새지요.” 우리는 북한에 취해 있는데 그는 언제 동네 이름까지 눈여겨 봐 두었다.
숭선은 두만강 물줄기 가운데서 가장 길다는 서두수(西頭水) 173㎞가 합수하는 두물머리이기도 하다. 어디서 자전거를 타고 오든 하룻밤을 묵어 가야할 곳이다. 일부러 농가에 식사를 부탁해뒀단다. 옥수수쌀밥에 두만강에서 잡은 돌종개 매운탕, 말린 피라미, 냉이고추장무침, 청취(곰취와 닮은) 등 함경도식 밥상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귀한 민가의 밥상이다.
백두산 원시림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마을 광평향(廣坪鄕)
- ▲(사진 위쪽부터 아래로) 중국 홍치하 강이 두만강에 합류하는 경치 좋은 곳. 백두산 동북사면의 용암대지로 개마고원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넓은 벌이 삼지연 쪽으로 펼쳐진다. 광평 근처의 중국군 변경검문소.
홍치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지나면 두 군데의 검문소를 지난다. 광평에 있는 중대단위의 검문소가 마지막이다. 졸린 듯 신분을 확인하는 홍안의 병사에게 국경은 너무 심심해 보인다. 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몇 가구만 살 뿐인 마을을 지나면 김일성 낚시터가 바로 강 옆 숲속에 보인다. 어쩌면 백두혈통을 자랑하는 김씨네의 한 시절 백두산밀영이 여기 아니었을까. 용암대지가 만든 산은 거대한 성채처럼 막아서지만 유순해서 거의 고원을 이룬다. 골짜기를 돌 때마다 막아섰다가 길을 비켜준다. 강폭은 좁아져 작은 개천으로 바뀐다. 어떤 곳은 촘촘히 박혀있는 검은 화산암을 징검다리로 발을 안 적시고도 건너갈 수 있을 정도다.
두만강 너는 저 길로, 나는 시원의 땅 백두산 천지로
백두산에서 오는 물줄기와 이제 중국 땅 장백산록으로 가는 산림도로는 헤어진다. 여기쯤을 중국도 도문강의 발원지로 공식 인정한다. 조·중21호경계비를 지나면 만주족 시원의 전설이 깃든 처녀 욕궁지 원지(元池)가 근처이고, 적봉(赤峰)을 넘어서면 백두산 원시림 안이다. 고요해야 할 숲이 도로공사의 굉음과 먼지로 덮인다. 그 사이로 백두산이 멀리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비포장으로 놔뒀던 이 원시림 속 S204번 도로도 국경의 작전도로로 격을 높이는 중이다. 안타깝다.
백두산은 6월에도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백두’라고 불렀을 게다. 알프스의 몽블랑도 따지고 보면 ‘하얀(blanc) 산(mont)’이란 뜻이니 만년설을 뒤집어 쓴 백두의 산이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또 다가오는 백두산, 숲속에서 만나는 쌍목봉, 그 깊은 원시림 속에 세관이 숨어 있다. 육로로 물자가 오가는 유일한 세관, 너무 썰렁하고 경계가 심해 이내 돌아 나온다. 거기서 북한의 삼지연공항이 20㎞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중요한 목이 아닐 수 없다. 남북관계의 얼음이 녹고, 이 공항을 이용해 백두산에 오르게 될 날도 꿈이 아니라면, 4륜구동 지프로 원시림 사이를 달려 이도백하(二道白河)로 갈 날 또한 오지 않겠는가.
석양을 받아 자작나무껍질은 하얗게 일어나고 숲에 어둠은 더 짙어간다. 두만강의 물줄기도 화산암반으로 스며들어 복류하고 보이지 않는다. 더러 보이는 물은 갈래를 달리하는 송화강 소속이다. 여긴 도로공사도 없다. 다시 오는 날 포장길이 되어 있을지 모를 아쉬움에 차를 내려 걷는다. “1년 치 공기를 한꺼번에 다 마시네!!” 누구 먼저랄 것도 없는 감탄이다. 장백산 북파(北坡) 입구에 이르자 서늘한 어둠이 우릴 맞는다. 북한 땅을 하루 종일 눈에 넣으며 달려온 두만강둑길, 자전거를 타고 꼭 다시 내려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