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김혜자, 열 살 소년으로 빛났다

yellowday 2013. 11. 19. 05:01

입력 : 2013.11.17 23:43

1인 11역 모노드라마 '오스카…'

부드럽게 흘러가던 극이 갑자기 멈칫했다. 끼익. 배우의 목소리 대신 갈라지는 기계음이 끼어들었다. 객석이 술렁이기 전,

대본에 없던 배역이 나타나 무대를 바로잡았다. 1인11역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에 12번째 인물로 등장한, 배우 김혜자 자신이었다.

"죄송합니다, 마이크가 문제를." 15일 첫 공연, 긴장으로 흘러내리는 땀에 마이크를 고정했던 테이프가 떨어져 생긴 사고였다. 여느 배우라면

 선물 자루가 비어버린 산타처럼 당황했을 순간, 김혜자는 모든 역할을 벗고 김혜자가 되어 사과하고 미소 지었다. 주인공 오스카도,

장미 할머니도 없이 오직 김혜자만 보였던 그때, 연기를 기다리던 관객 500명은 진심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올해 72세 배우 김혜자가 10대 소년부터 80대 노인까지 1인11역을 소화하는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연기 보는 즐거움을 그대로 전달한다
올해 72세 배우 김혜자가 10대 소년부터 80대 노인까지 1인11역을 소화하는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연기 보는 즐거움을 그대로 전달한다. /YK엔터테인먼트 제공
'오스카'는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열 살 오스카의 마지막 12일 이야기. 삶을 조롱하던 소년은 장밋빛 가운을 입은 자원 봉사 할머니를 만나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오스카, 할머니, 의사, 엄마, 친구 페기를 오가던 70대 김혜자는 열 살 오스카일 때 가장 빛났다.

입술을 비쭉 내밀거나 상기된 듯 눈을 깜박거리는 노배우는 무대가 연극의 공간이 아니라 영혼의 전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사고가 아니더라도, 마이크를 쓰는 점은 내내 아쉬웠다. 극장이 넓어 선택한 차선(次善)이겠으나, 배우의 육성을 가슴에 담아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연극이 아니던가. 보다 밀착된 공간에서 그의 땀방울까지 함께 호흡하고 싶다면 관객의 지나친 욕심일까.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12월 29일까지 영등포 CGV신한카드아트홀, 1588-0688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