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yellowday 2011. 4. 12. 00:06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19세기 독일 철학자이며 음악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고, 특유의 문체를 사용했으며 경구(aphorism)에 대한 자신의 기호(嗜好)를 드러내었다. 니체의 영향력은 철학과 철학을 넘어서는 다른 영역에도 실질적으로 남아있는데, 특히 실존주의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러하다.

니체의 문체와 진리의 대상 및 가치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질문은, 중요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했고, 대륙철학(현상학)과 분석철학 모두에서 방대한 이차 문헌이 생겨나게 했다. 그의 주요한 사상이 생(生)의 긍정으로서의 해석의 비극을 포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는 셀 수 없는 해석으로 빠져드는 것이며, 플라톤 철학과 그리스도교도덕주의에 대한 뒤집기이다. 또한 일부 지식인들의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 역시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민주주의, 자유주의, 힘의 논리 등의 마키아벨리즘, 권위주의, 반유대주의 등에 강력히 비판,반대하였지만 뒷날 그의 이름은 그가 혐오하던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되었다.

니체는 철학으로 자신의 분야를 바꾸기 전에 이미 철학자로서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24세에 그는 바젤 대학에서 고전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지만, 꾸준한 강연 활동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보불전쟁 이후 편두통과 안질환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시달려, 살아있는 동안 계속 그를 괴롭혔던 건강상의 문제로 1879년에 대학교수직을 그만두었고 강연활동도 중단하게 되었다. 이후 저술 활동에 매달렸으나 1889년 무렵부터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의 증세를 보였으며, 19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어머니와 여동생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다.

니체는 독일의 철학자·사상가이다. 작센 주의 레컨에서 출생하여, 5세 때 기독교 목사인 아버지와 사별하고, 누이와 함께 할머니의 가정에서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1864년 본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신학·철학을 배우고, 후에 리첼의 지도로 문헌학을 연구하였다. 1865년 스승 리첼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에 전학한 후, 주로 그리스 문헌학을 연구하고 몇몇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이때부터 쇼펜하워를 읽는 동시에 바그너의 음악에도 심취하였다. 1869년 리첼의 소개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고전 문헌학을 강의하였고, 1870년 군에 입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위생병으로 종군하였으나 병으로 바젤로 귀환하였다. 이후에 계속하여 그는 편두통눈병 등의 합병증으로 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1872년 처녀작 <비극의 탄생>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쌓아 올렸다. 그 후 주로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머물면서 저술에 전념하여 사색의 심화와 함께 가장 독창적인 저서를 냈다. <여명> <환희의 지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선악의 피안> 등에서 그는 크리스트교와 이상주의의 도덕을 '약자의 도덕', '노예의 도덕', '데카당스'라고 배격하고, '초인' '영원 회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일종의 형이상학을 수립하여 뒤에 생의 철학이나 실존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89년 정신병의 발병으로 어둡고 괴로운 말년을 보내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저작에만 몰두하였다. 특히 <즐거운 지식>에서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그가 크리스트교를 비판한 것은 유럽을 비판한 것으로, 키에르케고르와 더불어 실존주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출생과 학업 (1844 – 1869)

니체 1861년 모습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예전의 프로이센 (독일)의 작센 지방의 소읍인 뢰켄(Röcken)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러시아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빌헬름 4세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세를 넘었었다(니체는 훗날 그의 이름에서 가운데에 있던 "빌헬름"을 빼 버렸다.[1]) 니체의 아버지인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1813-1849)는 루터교 목회자이자 전직 교사이었고, 프란치스카 욀러(1826~1897)와 1843년에 결혼하였다.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니체는 1846년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남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년에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뇌 질환으로 1849년에 사망했다. 그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사망했다. 그 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 두 하녀들과 함께 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니체의 할머니가 1856년에 사망하자, 가족은 그들의 집으로 이사했다.

186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고 그 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친구가 되었던 곳인 사립학교에 다녔다. 두 친구는 모두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54년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그의 특출한 재능은 음악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업을 1858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그는 파울 도이쎈, 칼 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로마문학에 대해서 중요한 입문 과정을 이수 할 수 있었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과 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자신의 신앙도 상실하였다.[2] 그것은 아마도 그가 1835~18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그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3] 그 후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이듬해에 그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 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저서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장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7년 니체는 군에 자원하여 1867년 10월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포병으로 한 해 동안 복무하였다. 그러나 1868년 3월에 그는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가슴을 심하게 다쳤고 후송되었으나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니체는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그의 관심을 다시 그의 학업에 둘 수 있었고, 1868년 10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동안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였고, 고전문학자 에르빈 로데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학업을 끝낸 후 그 다음 해에 바그너와 처음으로 만났다.

바젤 대학교에서의 교수 생활 (1869–1879)

1869년 모습

24살에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바젤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 그는 프로이센의 국적을 포기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4] 하지만 그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카우프만은 그가 군의관 활동 당시 매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어떤 이들은 니체가 미친 까닭이 매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바젤 대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는 독일제국의 성립과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보았다.

1871년 니체와 친구들-에르빈 로데, 칼 폰 게르도르프, 니체

그는 대학교에서 취임 강의로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Homer und die klassische Philologie) 을 연설했다. 그는 신학과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와 어울렸으며, 그와 평생동안 친구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 철학자였던 아프리칸 스피르,[5] 니체가 자주 강의를 들었던 동료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도 니체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여러 강연회에 연사로 다니며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미 1868년부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기 시작했었는데, 그의 부인과 그에 매우 감탄하곤 했다. 또한 바젤에 있을 당시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이후 바그너의 뛰어난 제자의 한사람으로도 인정받았지만, 바그너가 점자 기독교화 되고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기독교적 도덕주의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그와 결별했다.

1869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시험과 논문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썼다. 하지만 리츨과 같은 니체의 동료들은 이 책에 대해 별로 열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3년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는데, 총 4편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눠진다. 네 편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바그너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 문화의 발전 노선에 도전하는,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1873년이 시작할 무렵, 니체는 또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철학 같이 사후에 출간된 기록을 점차로 모으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바그너와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니체는 말비다 폰 메이센부르크와 한스 폰 뷔로우를 만났고, 1876년에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비관주의를 해소시킨, 파울 리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진부한 공연과 대중의 천박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실망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78년 니체는 그 특유의 경구가 가득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였다. 또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즈음에 혼인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1879년, 건강이 더욱 악화되면서 니체는 바젤 대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다(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았는데, 가끔 두통이나 복통을 겪기도 했다. 1868년에 낙마사고와, 1870년에 걸린 병 때문에 니체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바젤 대학교에서 휴가를 많이 갖기도 했다.).

1879년 이후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하게 되었다.

독립 철학자 생활 (1879–1888)과 죽음

바젤 대학교에서 퇴직한 이후 그는 강연도 그만두고,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6]를 돌아다니면서 집필생활에 몰두하였다. 1881년, 프랑스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그 계획을 접고 만다.(건강에 대한 문제로 여행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7]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니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거주했다. 어머니가 죽자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겼고,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안장했다.[8]

철학

프리드리히 니체 (맨 오른쪽) 맨 왼쪽의 여자는 살로메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