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1865년 4월 15일)은 1861년 3월부터 암살된 1865년 4월까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남북 전쟁에서 노예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의 승리를 이끌어 미국의 노예제를 폐지하는 업적을 남겼다. 미국 사상 처음으로 공화당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링컨은 정규 법학 교육을 받지 못한 변호사(country lawyer)였으며, 일리노이주 하원의원과 미국 연방 하원의원으로 일했다. 또 상원의원 후보를 뽑는 두 번의 당 내 경선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확장되는 것을 거세게 반대했던[1][2] 링컨은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결국 대통령으로 뽑히게 된다. 임기 중 일어났던 남북전쟁에서 링컨은 북부주를 이끌며 미합중국에서 분리하려 노력했던 남부연합에 승리를 거뒀다. 1863년에는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고, 수정 헌법 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었다. 남부연합을 이끌던 로버트 리 장군의 큰 패배 6일 뒤, 링컨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임기 중 암살된다.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율리시즈 그렌트 장군과 같은 최고 지휘관들의 선발에 깊이 관여하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공화당 내 여러 분파의 지도자들을 내각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의 분파들이 협력하도록 잘 조정했다고 말한다. 링컨은 1861년 말 트랜트호 사건에서 영국과 전쟁 위기까지 몰렸던 위기를 잘 해결했다. 링컨의 리더쉽 아래, 북군은 남북의 경계가 되던 주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또 링컨은 18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다시 승리했다.
남북전쟁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링컨이 노예제와 관련해 타협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노예 폐지를 주장하던 극단적 공화당 지지자는 노예제 폐지를 너무 천천히 진행시켰던 것에 대해 비난했다. 이런 반대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뛰어난 수사법과 연설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다. 1863년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국가의 의무에 대한 상징적인 연설로 자리잡았다. 전쟁이 종료되가면서 링컨은 전후 재건에 대해 신중한 시각을 보이며 관대한 화해를 통해 국가를 통합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링컨은 지속적으로 전문가들에게서 모든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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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1809년 2월 12일 켄터키 주의 조용하고 아담한 나무로 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나이가 50세가 넘을 때까지도 소작인으로 산 목수였으며, 아들 애이브러헴 링컨 역시 목수가 되기를 바랐다. 링컨은 어렸을 때 키가 크고 말라서 맞는 옷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 낸시는 링컨에게 성서를 읽어주고, 평화는 가치있는 싸움보다 더 중요하다는걸 가르쳤으며, 1818년 독초를 먹은 소에서 짠 우유가 매개체인 우유병 혹은 우유중독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죽음으로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톰은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사라 부시 존스턴 링컨(영어: Sarah Bush Johnston Lincoln, 1788년 12월 13일 - 1869년 4월 12일)과 1819년 12월 2일에 재혼하였다. 부지런한 성격의 사라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받아다가 씻길만큼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았으며,책을 좋아하는 링컨의 편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링컨은 풍부한 학식을 얻을 수 있었다. 청년시기에는 우체국장, 변호사 ,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다.
정치 생활
1832년에 일리노이 주 의회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첫 정치경험을 하였다. 1833년에는 관심이 있던 법률을 혼자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1834년 일리노이 주 주의원당선을 시작으로 정치계에 입문, 1846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노련한 정치가 더글러스 현역 상원의원과 경쟁을 벌인다. 이때 이들의 논쟁 주제는 노예제도였는데, 당시 링컨은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연설로 노예제도로 대립하던 미국인들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결과는 더글러스의 상원의원 재선이었지만, 더글러스와의 논쟁 때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예제도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861년 3월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노예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링컨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전쟁 중이던 1864년 11월에 재선에 성공하였으며, 1865년 4월 3일 남북전쟁은 남부의 항복으로 끝났으며, 1865년 4월 14일 연극을 보다가 총격을 당했고, 그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아마도 그의 원인은 남북 갈등 때문일지도 몰라도 미국의 인디언 박해와 관련된 전승인 테쿰세의 저주 때문에 그런 듯 하다는 의견도 있다.
암살 배후 의혹
링컨의 암살 배후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링컨을 암살한 저격수 존 윌크스 부스의 배후에 남부의 결사단체가 사주했다는 설도 있으나, 부스는 재판도 받기 전에 의문사했기 때문에, 배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기타
링컨의 실상
일부 기독교인들은 링컨이 노예제도가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아 반대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링컨의 주된 관심사가 노예제도의 폐지나 노예제도 자체라기보다는 노예제도 존폐문제로 서로 대립하던 남부와 북부의 분리를 막는 것이었던 점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3]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노예출신 흑인들은 옛 상전 밑에서 농장 노동자로 다시 종속되었으며, 공화당의 반발로 흑인들에 대한 사회에서의 차별도 여전했다. 오히려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비밀 테러 단체(대표적인 예가 KKK단)의 출현으로 흑인들은 새로운 탄압을 받았다.
물론 링컨 자신은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에 대해 '악의 제도'라고 할 정도로 다소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노예제도와 흑인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는 자본주의 경제지역이라 노예가 아닌, 임금 노동자가 일하는 북부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다.[4] 나아가 링컨은 의지가 박약하거나 미숙하여 남북분리를 초래했다는 우려를 듣기도 하였다.
경제학자 토머스 딜로렌조는 저서 《링컨의 진실-패권주의, 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에서 링컨의 연설문, 군 지휘관들에게 보내는 서한 등 1차 문헌을 참고자료로 인용하여, 링컨은 단 한 번도 흑인 노예를 변호한 적이 없고, 노예해방선언은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이며, 남북전쟁 당시 조직적 파괴, 자신을 비판한 언론 탄압, 인신보호영장 정지 등으로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점을 들어 링컨을 "정략적 독재자"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미국 중앙정부의 비대화, 로비의 횡행, 정경유착형 엽관제를 불러왔다고도 비판했다.
링컨의 친구이자 파트너였던 헌돈은 링컨이 자신에게 1835년과 1836년간에 매독에 걸렸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헌돈은 링컨의 아내 역시 링컨에게서 매독이 옮겼을 것으로 추측했고, 그의 세 자녀가 유아 사망에 희생된 이유도 매독과 관련있을 것으로 예상했다.[5]
개인적인 인적사항
링컨은 농담을 잘하는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친어머니(우유병으로 죽음)와 누나(아이를 낳은 후 몸조리가 잘못되어 죽음)의 죽음, 우체국장 시절 사귀던 애인을 잃은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재임 중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링컨은 메리 토드와 연애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문화갈등을 겪었다. 물론 링컨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3명의 아들을 사랑했지만, 메리와의 성장환경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메리는 명문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몸에 밴 사람이었던 것에 반해, 소작인의 아들인 링컨은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벽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읽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 부부가 갈등을 겪게 했다.어떤 사람은 토드가 악처였다고도 얘기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의 결혼 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뉴스위크 한국어판 보도에 의하면 1960년대에 한 내과 의사는 그가 마르팡 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냈다. 링컨은 키가 매우 크고 사지가 길었는데 이는 마르팡 증후군의 특징이며, 이 증후군을 가진 소년이 링컨의 먼 친척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링컨의 DNA는 현재 남아 있지만, 그가 이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링컨의 일생에 대한 사료(史料)로는 어머니 낸시의 사촌인 드니스 행크스의 증언[6]과 변호사시절 같이 활동한 윌리엄 헌돈 변호사의 전기가 있다.
게티즈버그 연설
- 이 부분의 본문은 게티즈버그 연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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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연설은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후, 링컨이 전투 격전지에서 발표한 선언문으로, 짧은 문장 속에 민주주의의 이념을 잘 요약했다는 평을 받는다.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의 공통점
- 이 부분의 본문은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의 공통점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일치하는 점이 많으며, 다음은 공통점의 일부이다.
- 두 대통령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는 점,
- 두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은 재판 없이 의문사를 당했다는 점,
- 그의 부인은 백악관에서 자식을 잃었다는 점,
- 두 대통령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46년, 1946년이라는 점,
- 두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61년, 1961년이라는 점,
- 두 대통령은 테쿰세의 저주를 당했다는 점,
- 그의 후계자의 성이 존슨이라는 점,
- 그의 부인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점,
- 두 대통령은 모두 달러의 주화에 초상이 그려진 점.
- 링컨 대통령은 포드 극장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만든 링컨 컨티넨탈 차를 타고 가다가 암살당했다는 것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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