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전봉준- 동학란

yellowday 2011. 4. 9. 07:28

 

전봉준(全琫準, 1854년 ~ 1895년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이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별명은 '녹두 장군'으로 키가 단구라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이다.

 

생애 초기

전봉준은 몰락 양반 출신인 전창혁(全彰赫, 일명 전승록)과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안전씨 족보에 의하면 족보상 이름은 영준(永準)이요, 봉준(琫準)은 어릴적 이름이며 녹두(綠豆)는 그 체구가 작아서 불리워진 별호라 한다.[1]

평소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며, 약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서당에서 훈장 또는 접주(接主)[2] 일도 하고, 묘자리도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3]

1893년 그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일명 전승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저항을 하다가 조병갑의 모친상 때 부조금 2천 냥을 안 거둬 줬다는 이유로 모진 곤장을 맞게 되어[4] 몸이 허약해지더니 이내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 이 일이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과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스스로를 선비라고 칭하며, 농민이기도 하였다.

제1차 농민 봉기

전봉준은 30대 전후에 동학에 몸을 담고, 이후 고부 지방의 동학접주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5] 최시형이 그를 만나 직접 임명하지 않았고, 또한 최시형이 초기에 전봉준의 봉기에 반감을 나타냈기 때문에 반론이 있다.[6] 당시 은밀히 세를 불렸으며,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했다는 설도 있다.[5]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하고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행위를 다시 일삼았다. 특히 1893년에는 물세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하여 불법으로 세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1894년 음력 2월 15일 동학교도를 이끌어 고부 관아를 공격하게 되며, 이를 고부 봉기라 한다. 그리고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세금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부패한 관리들을 붙잡았다. 뒤이어 음력 4월 26일에 백산 기포를 일으킨다. ‘전봉준은 창과 칼을 맞지 않고, 총구멍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재주가 있다.’라는 소문도 퍼져나갔다.

이 보고를 받은 조선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일단 농민군을 해산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학이 심했으며 농민군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무자비한 탄압·처벌을 감행했다. 이에 재봉기를 결의하고, 이 기회에 국가 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

이해 음력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등과 협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동학교도를 주도 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陳容)을 정비하고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와 함께 동도대장이 되어 척왜(斥倭)·척양(斥洋)과 부패한 지배 계급의 타파 등 사대 강령을 내세우고 부근의 고을로 진격하여 관군(官軍)을 무찔렀다.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대파하고 이어 부안·정읍·고창·무장(茂長) 등을 장악하고, 이어 음력 4월 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휴전

그러나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오고 동시에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압박함으로써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12개의 항목을 들어 개혁할 것을 요구하는 대가로 휴전 제의를 받아들이는데,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1. 불량한 양반의 죄를 조사하여 벌줄 것
  2.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3.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성이 쓰는 것을 없앨 것
  4. 불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없앨 것
  5. 일본인과 내통한 자를 엄중하게 처벌할 것

제2차 농민 봉기

그 후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하여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썼다. 한편 정부의 관헌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했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 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점차 조선에서의 침략 행위를 더해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했다.[5]

전봉준은 음력 9월 삼례(三禮)에서 남도 접주가 되어 12만 명의 병력을 동원·지휘하여 북도 접주 손병희의 10만 명의 병력과 동원하였으며, 최고 교주 최시형의 총지휘를 받으며 항일 구국의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한때 중부·남부의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특히 이천(利川)·목천·공주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하였고, 음력 11월의 금구(金溝)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다.

전봉준은 동지 몇 명과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킬 준비를 했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한신현김경천 등의 배신으로 피로리(避老理)에서 관군에 체포되었다. 1895년 음력 3월, 그의 동지들인 손화중 · 최경선 · 김덕명 · 성두환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 이평면 조소리에 전봉준을 추모하는 사적비를 건립하였고[1], 1981년 한국청년회의소가 전주 덕진공원에 추모비를 세웠다.

가족 관계

본처 최씨 소생 두 아들은 요절한 것으로 알려졌고, 후에 전만길을 양손자로 삼아 후사를 이어오고 있다.

  • 부 : 전창혁(全彰赫, 다른 이름은 전승록, ? ~ 1862년)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