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 |
1851년 음력 1월 23일 충청남도 공주 | |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 |
홍종우에게 암살 | |
조선 | |
자는 백온, 호는 고균, 고우, 시호는 충달 | |
1872년 알성문과 장원급제 | |
한말의 문신,정치인,혁명가 | |
기계유씨 현감 유영환의 손녀 | |
외아들 평안도관찰사 김영진 | |
생부김병태/ 은진송씨,양부 형조참의 김병기/전주이씨 | |
8촌 김형규(김좌진의 부), 9촌 김좌진 |
김옥균(金玉均, 1851년 음력 1월 23일 충청남도 공주~1894년 3월 28일)은 조선의 문신이며 구한말의 정치가·혁명가로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우(古遇), 별호는 고균(古筠)이며, 시호는 충달(忠達), 본관은 (신)안동이다. 급진개화파로서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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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초기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에서 안동 김씨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유력한 세도가 출신으로[3] 6세 때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고, 187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2]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려 옥당 승지(玉堂 承旨)·정언(正言)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신문물 견학 [편집]
1877년 김옥균은 의관 유홍기를 통해서 역관 오경석이 가져왔던 서적을 입수하여 탐독하였고, 박규수·유홍기·오경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습득하였다.[3] 유홍기는 김옥균에게 봉원사의 승려 이동인을 소개해 주었는데, 1879년 김옥균은 박영효와 함께 이동인의 여비를 대주어, 이동인은 그들이 제공한 돈으로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福?諭吉)를 포함한 일본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때 이동인은 정보와 함께 일본에서 구한 각종 책들과 문물을 김옥균과 유홍기에게 제공하였다. 그 뒤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을 이루어 그 지도자가 되었다.[3]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 제국을 시찰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고 여겨진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들을 비롯한 아시아의 개혁파들에게 메이지유신으로 발전한 일본은 하나의 개혁의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동행하였던 이상재와도 교우를 쌓았다.
개혁정치 활동
1882년 임오군란 후 사후(事後) 대책의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 겸 부사로서 일본에 갔을 때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의 조야(朝野)와 교제하는 동안 본국 개혁 혁신의 필요를 절감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개화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유학생을 받아 일본제국의 여러 학교에 입학을[3] 주선하였다. 이 기간 중에 저서 《치도약론》을 집필하였는데, 도로 정비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치도국 설치, 기술자 양성, 기계 구비, 오물 처리법 등을 포함한 17개 세목의 내용을 논하였고, 이는 한성순보에 게재되었다.[3] 특히, 김옥균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면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883년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하여 서재필과 그의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1883년 음력 3월 16일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가 되어 포경(捕鯨) 업무를 겸하였다.[4] 188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군인 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 사업에 필요한 차관을 얻으려 하였으나, 민비 세력과 뮐렌도르프의 방해로 차관 모집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귀국하였다.[3] 이때부터 민비 세력과의 갈등과 알력이 극에 달하게 되어 민씨 정권 타도를 획책하였다.
갑신정변 실패와 최후
이후 '인민평등', '문호개방' 등 개혁을 단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며[2] 1884년 보수파인 사대당의 민씨 일파를 후원하는 청나라가 안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틈을 타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사대당의 중심인물을 숙청하는 등 정변을 주도하여 당시 신정부의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의탁하였다.
망명객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이름으로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였으며, 청나라를 꺼리는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오가사와라에, 이어서 홋카이도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어 도쿄에 귀환했다.
1894년 3월 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조선 정부에서 보낸 홍종우에게 리볼버 권총으로 저격당해 살해되었다.[5][6]
죽은 뒤
유해가 조선으로 옮겨져 강화도 양화진에서 부관참시를 당하고,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 실종되었다. 김옥균의 죽음은 곧바로 동북아 정세의 외교적으로 확대되었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일본제국은 곧바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언론매체 등을 통해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등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청일전쟁을 향한 일본제국의 국민감정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용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사면·복권되었고, 아관파천 후 복권이 취소되었다가 1910년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5]
평가
개화사상에 철저히 심취하여 스승 유홍기가 중인 신분임에도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전해진다.[3] 이후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명되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2007년 이후 뉴라이트등 일부 단체에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뉴라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기존에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제도와 문벌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평가,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보기도 한다.[7][8][9]
그이 생가 터에는 추모비가 설치되었으며, 1976년 충청남도 기념물 13호로 지정되어 공주시가 관리하고 있다.[2]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머리털과 옷을 묻은 무덤이 있다.
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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