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張志淵, 1864년 ~ 1921년 10월 2일)은 한국의 언론인으로, 아호는 위암(韋庵)이다. 을사조약 때에 쓴 반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해졌지만 이후의 행적에는 친일 경력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898년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사흘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되었다. 을사조약을 규탄한 <시일야방성대곡> 은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 에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되어 기사로 나갔다.이후 「코리아데일리뉴스」, 「제팬크로니클」 등의 언론이 이 명문을 인용했다.
이후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며 1년가량 머물렀고, 귀국하여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이 신문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 복간되는 과정을 거쳤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바 있다.
친일 논란 [편집]
장지연은 이 황현의 절명시 필화 사건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시[1]와 논설을 기고했다. 매일신보 기고 활동은 1914년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조선인은 단결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2]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 오른 이들 가운데 논란이 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3][4][5][6][7] 논란의 이유로는, 오랫동안 교과서 등을 통해 알려진 통념에 배치된다는 점, 지방에서 기고 위주로만 활동하면서 말년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 일반적인 전향 친일 인사들이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사건이나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압박과 같은 계기를 통해 집단으로 친일파로 방향을 바꾸는 데 반하여 1910년대 초반에 특별한 동기가 알려진 바 없이 이미 천황을 찬양하고 총독을 칭송하는 행적을 보였다는 점, 친일 증거물 중 그가 쓴 것으로 의심 받는 《경남일보》의 시나 기사에는 기명 기사를 내지 않는 관례 때문에 글쓴이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장지연의 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 등이 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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