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

yellowday 2011. 4. 8. 23:50

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 1861년 ~ 1939년 양력 9월 21일)는 조선 말기의 정치인으로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며, 철종의 사위이기도 하다.

 

 

 

생애

노론의 실력자인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1872년 음력 4월 선왕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였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고, 금릉위(錦陵尉)에 책봉되었다.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朴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3]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했다.

1882년(고종 19년)의 제물포 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4][5] 이때 그가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 도안을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 조야(朝野)를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기도했으나, 민태호·김병시(金炳始)·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들의 정권 장악으로 실패했다. 1882년 음력 12월 19일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접한 인력거를 들여와 한성부판윤 재임 기간 중 조선에 보급했다. 1883년 음력 3월 17일 광주부(廣州府) 유수로 발령을 받았다.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1884년(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 전후영사 겸 좌포장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되돌아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개명(改名)하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자 이듬해 귀국했다.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1895년(고종 32년) 반역 음모사건(고종 양위 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융희 1년) 오랜 망명 끝에 박제순 내각의 알선으로 귀국하여 사면을 받고,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을 하다가 대신 암살 음모사건으로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28만 원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귀족원 의원(1932년)과 조선식산은행 이사,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선전 심사위원, 조선농회 부회장 및 조선농회 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로 시종하였다.[8]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9][10]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이우와 결혼하였다.

1939년 정 2위 훈 1등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후손과 묘

박영효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부인 범(范)씨와 사이에서는 2남 1녀를 두었다. 자녀 가운데 박흥원(朴興元)은 불가에 귀의해 서울 봉원사 주지로 있었으며, 박흥원의 아들 박혜륜(朴彗輪) 역시 승려이다. 범씨의 딸 박묘옥(朴妙玉)은 인천의 부호 한갑현과 결혼하여 5남2녀를 두었다.[11]

그의 묘는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손자 박환범이 묘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12]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의친왕의 차남 이우의 처가 되었다.

평가

박영효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반면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을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며, 뉴라이트 등은 박영효와 김옥균개화파청나라에 바치던 조공과 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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