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yellowday 2011. 4. 8. 11:13

 

         
최남선
1890년 4월 26일
한성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
호는 육당, 자는 공륙
와세다 대학교
사학자, 문인
천주교 (베드로)
현씨
최헌규 / 강씨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1])은 한국의 사학자, 문인, 문화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이광수,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본관은 동주, 호는 육당(六堂), 한샘, 남악주인(南嶽主人), 곡교인(曲橋人), 육당학인(六堂學人), 축한생(逐閑生), 대몽(大夢), 백운향도(白雲香徒)이다.

 

생애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1904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해 도쿄 부립제일중학교에 3개월간 다니다 중퇴하였으며, 1906년에는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를 역시 3개월간 다니다 동맹 휴학으로 중퇴하였다. 이어 이광수 등 유학생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이때 유학생 회보인 《대한 흥학회보》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귀국한 뒤 우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신문관을 창설하였다. 여기서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을 발행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이듬해 안창호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설립하여 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에 《소년》이 폐간되었으며, 이듬해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 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명령으로 모두 폐간되었다.

1914년 다시 종합 계몽 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민중 계몽을 위해 공헌했으나 1918년 폐간되었다. 1918년 《청춘》에 역사 연구 논문인 《계고차존》(稽古箚存)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신문관에서 많은 책과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우리 민족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광문회’를 1910년 설립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 나라의 귀중한 옛 책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민족 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당시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한 20여 종의 고전이 간행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하였으나 1921년 10월 18일에 가출옥하였고, 그 뒤 변절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가출옥 사유는 “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美濃部俊吉)에게 잡지 《동명》의 발행 자금을 지원토록 주선하였으며, 그 이유를 최남선의 출판물이 “조선의 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진학문(秦學文)·이광수 등의 생계비 출처로 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출옥 후 《동명》지와 《시대일보》를 발간하여 일본제국의 침략 정치를 규탄하고 우리 민족 정신을 불러일으키기에 힘썼다는 견해도 있다.

1925년동아일보》에 사설을 쓰는 한편, 〈단군론〉(1926년), 〈불함문화론〉(1928년)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불함문화론〉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우리나라 단군 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일본제국이 총독부 내에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둘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다. 1937년 중추원 참의를 거쳐 1938년만몽일보》고문과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이로써 광복 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하지만 그를 기소한 반민특위이승만친일파들을 정치적 목적에서 감싸면서 1948년에 해산됨에 따라 그의 친일행각은 사실상 처벌되지 않았다.

한국 전쟁 후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재직하였고, 1957년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1973년 고려대학교 아시아 문제 연구소에서 《육당전집》이 발간되었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