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義慈王, 595/9년[1]~660년, 재위: 641년~660년)은 백제의 제31대 왕이며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대개 의자왕의 ‘의자’(義慈)는 시호라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의자왕의 휘이다. 태자 때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으로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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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 [편집]
599년 당시 백제의 왕족인 서동과 사택부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어 아버지가 왕에 오르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불렸다. 641년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 [편집]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면서 당 태종에 의해 '주국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되어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그는 왕위 초기에는 아주 휼륭한 정치를 폈다.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연개소문과 연합하여, 의자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어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구 가야지역 최대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는 등 백제의 힘을 떨쳤다. 이때 김춘추는 대야성에서 사위와 딸을 잃었다.
김춘추가 고구려로 들어가 군사원조를 요청했을 때 고구려는 본래 자신들의 땅이었던 죽령 서북지방을 돌려주면 돕겠다고 하였다. 의자왕은 당태종에게 부여강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연합하지 않고 오히려 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원한다고 하였다.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하고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으려 시도하였다.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은 644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하였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고자 신라에서 원군을 징발하자 이 기회를 노려 649년 신라의 7성을 습격하다가 김유신(金庾信)에게 역습을 당하였다. 그 후 백제는 결국 이를 다시 빼앗다. 648년 겨울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태종의 신임을 얻고,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중국과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백제도 조공사신을 보내어 관계개선을 시도했으나 당이 신라의 실지를 반환하라고 하자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의자왕은 65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성 30여 개를 빼앗았고, 659년 4월 신라를 다시 공격하였다.
백제의 멸망 [편집]
즉위 후에 국위를 만회하려던 의자왕의 노력은 57세를 넘기자 차츰 약해졌으며, 방탕해진 의자왕은 왕비 군대부인(또는 은고)과 함께 사치스러운 주연을 매일 열었다. 그로 인해 총기가 흐려지고 방종해져 충신 성충의 말을 무시하고 하옥하자 국정이 문란해져 갔다. 그리고 그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말이 “육로는 탄현(炭峴)에서, 수로는 기벌포(伎伐浦)에서 막으소서.”라고 하였지만 그는 그 말을 무시하고 여흥에 빠졌다.
거듭된 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라를 압박하자 마침내 당과 신라는 밀계하여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협공을 하였다. 귀양 가있던 흥수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성충과 같은 말을 하자 믿지 못했다. 기벌포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은 대패하였고, 황산벌에는 계백(階伯)을 5천의 군사와 보내어 4번을 막아냈지만 백제군의 10배나 되는 신라군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계백과 그의 군사는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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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소정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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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소정방전〉 |
사비성 부근에서도 결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 1만이 전사하며 대패하고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이 포위되자 태자 융과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으며, 사비에는 둘째 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곧 항복했다. 그 후 의자왕도 항복했다.
중앙군의 전멸과 왕성이 무너지며 거의 모든 왕족과 의자왕의 측근 최고 지배층들이 모조리 포로가 되자 가망없다고 여기고 의자왕을 배신한 웅진성 방령 예식(禰植, 예식진(祢寔進))에 의해 항복이 진행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본기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이 너무 쉽게 항복을 하였는데, 의자왕은 이것을 대당외교투쟁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지 국가의 멸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당은 이후 부여 융을 웅진도독으로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아 동맹을 맺게 하는 의식을 웅진 취리산에서 행한 바 있다. 즉, 당나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2]
그 후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천 명과 함께 당나라 수도로 압송된 후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망국의 군주가 묻힌다는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다.[3][4]
논란 [편집]
3천 궁녀와 낙화암 [편집]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서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서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라는 내용이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서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5]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 1448~?)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이다.[3]
“3천 궁녀”를 맨 처음 언급한 글은 윤승한(尹昇漢)이 지은 소설 《김유신》(野談社, 1941년)이고, 최초의 공식 기록은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조항이다.[5]
결국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충 [편집]
성충이 간하다가 감옥에 갇혀 옥사했다는 이야기도 실제로는 의자왕의 귀족층 숙청에서 나온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출처 필요]
잘못 되었다고 알려진 사실 [편집]
의자왕은 술과 여흥에 빠져,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나,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고 전해지고, 술과 여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또한, 《삼국유사》는 전설도 포함되어 있고, 《삼국사기》는 실제 있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가족 [편집]
- 부왕 : 백제 제30대 무왕
- 모후 : 사택부인
- 왕비 : 은고(또는 군대부인)
- 동생 : 교기
- 아들 : 부여풍
- 아들 : 부여융
- 손자 : 부여덕장(德璋)
- 증손자(첫째) : 부여경(敬)
- 증손녀(둘째) : 부여태비(扶餘太妃, 738년 49세로 사망) - 당 고조 이연의 증손자인 괵왕 이옹(李邕)의 두 번째 부인.[4]
- 손자 : 부여덕장(德璋)
- 아들 : 부여용
- 사촌동생 : 복신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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