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7.13 03:03
떠넘기기에 제대로 '열린' 병졸들이 사방으로 몰려다니며 난리를 피웠고 바로 임오군란의 시작이다. 권력에서 밀려나 9년째 '노인네'로 살아가던 대원군은 군란 소식에 희색이 돈다. 그 밤에 바로 병졸들에게 먹을 것과 돈을 보내니 저질러 놓았으나 앞날이 불안하던 병졸들의 기세가 등등해진 것은 물론이다. 다음 날 폭우로 검은 하늘 아래 병졸들은 창덕궁으로 몰려가고 이 행렬에 대원군까지 동행한다.
대원군이 묻는다. "중전은 잡아 어찌하려느냐." 병사들이 답한다.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마침 나인 옷을 입고 그 앞을 지나던 민비가 대원군에게 딱 걸렸다.
"병졸들이 그대를 좀 보자는데?" 민비, 대뜸 손을 들어 철썩하고 대원군의 뺨을 갈긴다. "제 정신이야?" 대원군이 넘어져 버둥대는 사이 민비는 출구를 향해 질주하지만 이내 난군에게 가로막힌다. 순간 무예청 홍재희가 기지를 발휘하여 자기 여동생 홍 상궁이라 둘러댄 뒤 민비를 업고 빠져나와 냅다 달렸다.
민비는 아버지 민치록의 묘소가 있는 여주로 피신하기로 한다. 광주 땅을 지날 때 주막에서 숨을 돌리던 민비 일행에게 동네 아낙들이 물었다.
"서울에서 난리가 났다며? 중전인가 여우인가 때문에?" 나는 모르오 답하며 민비, 무례에 이를 오도독 간다.
궁을 탈환한 후 대원군은 도승지 조병호를 불러 민비의 죽음을 알리고 국상 치를 준비를 하라 명한다. 조병호가 묻는다.
"승하하신 것을 확인하지도 못했는데 어찌 국상을 치른단 말씀이오."
대원군은 아직도 정세 파악이 안 되니? 하는 표정으로 흘기니 조병호, 붓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함부로 할 수는 없소."
왕비의 옷만 가지고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상소가 빗발치는 가운데 대원군은 다른 승지를 불러 기어이 국상을 반포한다.
조선 팔도가 흰 물결에 뒤덮였으나 훈련도감의 신현 혼자 상복을 입지 않았다. "시신도 보지 못하였거늘 국상은 무슨."
여주에 은거 중이던 민비는 궁에 있던 민태호에게 밀서를 보내나 이런 답장을 받는다.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당분간 그냥 계시라."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자 민비는 컴백을 개시한다.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에 광주에 들른 민비는 자기를 험담한 마을을 초토화시킨다. 대원군은 재집권 33일 만에 자리에서 내려오고 민비는
9월 12일 서울로 올라와 청나라의 비호 아래 다시 정권을 잡는다. 13년 후인 을미년 민비는 궁궐에서 또 한 차례 습격을 받았고 이번에는 살아서 궁을 나가지 못했다.>
7월 19일이 임오군란이 일어난 날이고 최근 민비가 을미사변 때 죽지 않았다는 독일 외교 문서가 발견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어 윤효정 선생의
'풍운한말비사' 중 옥수일번(玉手一�)편을 토대로 당시 일을 한번 정리해봤다. 제목을 달자면 '막장 한국 근대사'쯤 되겠다. 사실이라면
민비는 역사상 유례없이 두 번 죽었다 살아난 인물이 된다.
일본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실정은 가려지고 현대에서 '명성황후'라는 신화로 부활한 민자영. 정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명을 부지했다면 적어도 나라에 힘이 없어 외국 도살자들에게 왕비가 척살됐다는 오명은 벗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거 하나는 소득이겠다.
모쪼록 '명복'을 빈다. 왕과 왕비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 참으로 다행이다. [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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