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7.08 03:04
'신라와 서역' 세 가지 쟁점
서양식 황금보검, 로마풍(風)의 대형 유리병, '서역인(西域人)' 무인석상….
신라가 중국 대륙을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교역했다는 사실은 유물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라와 서역의 교류 실상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제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학술회의'는 관련국 학자들이 신라와 서역의 교류에 대한 의문점을 따져보는 자리였다.
①신라 왕실의 뿌리는 중앙아시아?
4~6세기 신라 왕실의 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廓墳)은 고대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족의 무덤 쿠르간과 비슷하다. 그래서 신라 왕실이 이 지역에서 온 유목·기마 민족이라는 학설이 제기된다.
신라가 중국 대륙을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교역했다는 사실은 유물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라와 서역의 교류 실상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제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학술회의'는 관련국 학자들이 신라와 서역의 교류에 대한 의문점을 따져보는 자리였다.
①신라 왕실의 뿌리는 중앙아시아?
4~6세기 신라 왕실의 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廓墳)은 고대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족의 무덤 쿠르간과 비슷하다. 그래서 신라 왕실이 이 지역에서 온 유목·기마 민족이라는 학설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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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고분의 서역 관련 유물들. 왼쪽은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나온 황금보검, 가운데는 황성동 석실 고분에 부장된 토용(土俑), 오른쪽은 괘릉 앞 무인 석상이다.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제공
반면 사마세프 카자흐스탄학술원 고고학연구소 이스타나분소장은 "중앙아시아의 쿠르간은 4~5세기에도 나타나고 두 지역의 유물이 비슷하기 때문에 연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인숙 한성백제박물관장은 "4세기 이후 신라에서 금 제품이 많고 김씨(金氏) 왕조가 성립하는 것은 금을 중시하고 기동성이 뛰어났던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이주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②괘릉 무인석상은 서역인?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 앞의 '서역인' 석상(石像)에 대해 아나르바예브 우즈베키스탄학술원 고고학연구소 부소장은 석상과 사마르칸트 벽화의 유사성을 들어 "석상의 주인공은 사마르칸트에서 온 소그드인(人)"이라고 주장했다. 7~8세기 실크로드 전역에서 활동했던 소그드인의 일부가 신라에 들어와 공을 세운 것을 치하해서 석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반면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소그드인이 2만명이나 됐던 당나라도 황제릉 앞에 서역인상은 없었다"며 "당보다 폐쇄적이었던 신라가 왕릉 앞에 외국인 석상을 세웠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성왕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사찰의 금강역사와 사천왕상은 서역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③신라 문화는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 고분의 유물 중 가장 이색적인 황금보검과 로만 글라스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요시미즈 쓰네오 일본 노도지마글라스공방 회장은 "황금보검은 양식·문양·재질로 보아 중부 유럽에 살았던 켈트족 왕이 선물한 것"이라며 "신라 왕관의 형태(수목관·樹木冠), 로만 글라스, 각배(角杯), 사슬 장신구도 신라가 로마 문화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상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황금보검의 양식은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서 출토된 단검과 비슷하고 기술은 동로마에서 기원했다"며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집단이 동유럽의 장인에게 주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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