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7.06 03:08
['둔황' 최대벽화 오대산圖 등서 古代 한국 관련 그림 다수 확인]
古代 한국인 모습 왜 둔황에? -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 둔황으로 대거 이주 돼… 석굴 만들고 불교 활동 참여"
古代 한국 문화史 연구에 도움 - 당나라~송나라 시기의 그림, 한국 인물상 공백 메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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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황 막고굴 제237굴에서 확인된 백제인.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제공
'오대산도'에는 신라와 고려가 중국에 보낸 사절단이 함께 등장한다. 이는 밑그림이 만들어진 것이 신라(기원전 57~935)와 고려(918~1392)가 공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오대산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있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신라에서 보낸 공양 사신)'라는 화제(畵題)의 그림에는 통역원, 사신, 두 관원, 마부 등 5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옷깃이 둥근 단령(團領)을 입고 있다. 그 왼쪽 아래에 있는 '고려왕사(高麗王使)'라는 그림에는 연락관, 사신, 짐꾼 등 3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둥근 옷깃의 짧은 상의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장포를 입었다. 신라 사절단과 고려 사절단은 관복은 다르지만 같은 양식의 흰색 긴 바지를 입고 있다.
'오대산도'의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는 '신라왕탑(新羅王塔)'은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오대산에서 수행한 승려'가 세운 탑이다. 리신 연구원은 탑의 주인공을, 신라 귀족으로 당나라에서 7년간 공부하며 오대산을 찾았던 자장(慈藏·590~658) 스님으로 추정했다. '보리지암(菩提之庵)' 그림은 만년에 오대산에서 수행하고 공부한 혜초(慧超·704~787) 스님의 거처였던 보리사 터에 다시 지은 암자를 그린 것이다.
다른 둔황 석굴에서도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많이 확인됐다. 고구려인은 조우관(鳥羽冠)에 깃털을 보통 두 개 꽂았지만 세 개 또는 네 개를 꽂은 경우도 있었다.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 목도리와 허리띠를 하는 일이 잦았다. 백제인은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날씨가 안 추워서 옷깃이 밖으로 접힌 번령(�領)의 옷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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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에 들어 있는 ‘신라송공사’의 전체 모습. 중앙에 신라에서 온 사신 행렬이 보이고 오른쪽에 두 명의 중국 관원이 이들을 맞고 있다.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제공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확인된 둔황 석굴들의 조성 시기는 당나라 초기(618년)부터 송나라 초기(1035년)까지 걸쳐 있다. 국내에는 이 시기의 인물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5일 국제 학술회의에서 리신 연구원의 발표를 들은 임영애 경주대 교수(중앙아시아학회 회장)는 "그동안 한국 학자들의 접근이 자유롭지 않았던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 관련 자료가 많이 공개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며 "하지만 조우관으로 분류된 일부 그림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등 학문적으로 따져봐야 할 부분도 상당히 있다"고 말했다. 이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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