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 국보순례

[80] 일본·미국에 있는 고려청자

yellowday 2011. 4. 5. 22:03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려청자 중 대대로 전해지는 유물은 불과 몇 점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고려청자의 99%가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고 극히 일부가 개성 만월대 궁궐터에서 나왔을 뿐이다.

왕조의 멸망과 함께 잊힌 고려청자의 존재를 우리가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독특한 장례풍습 덕분이었다. 고려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이 저승에서 부처님께 차를 공양할 다완(茶碗)을 넣어 주었다. 혹은 찻주전자·향로·꽃병을 곁들이기도 했고, 또 생전에 그가 좋아했던 술병이나 연적도 넣어 주었다.

이렇게 땅속에 묻혀 있던 청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76년 조일수호조약, 1882년 조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다. 1884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협회는 해군소위 버나도우를 파견해 조선의 민속자료를 수집해 오게 했다. 이때 그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 보낸 물품 중에는 한 다스의 고려청자가 들어 있었다. 이 무렵 도자기 수집가 에드워드 모스는 궁궐터에서 나왔다는 청자를 구해 갔다. 이것이 지금은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고려청자가 드러난 것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군용철도로 경의선을 착공하면서 개성 부근 공사장에서 고려청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일본인들은 다투어 이를 당시로서는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서울엔 곤도(近藤)라는 골동상점도 생겼다. 워싱턴의 프리어, 시카고의 타이슨, 클리블랜드의 루드로우 등도 이때 고려청자를 수집해 갔다. 이후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 왕릉과 고분들이 백주에 도굴되었다.

1905년 초대 통감으로 온 이토 히로부미는 최고의 장물아비였다. 그는 청자를 닥치는 대로 사 메이지 일왕과 일본 귀족들에게 선물하였다. 그 숫자가 수천 점에 이른다. 그는 어느 날 고종 황제를 만나면서 고려청자 한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고종은 "이 푸른 그릇은 어디서 만든 것이오?"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가 고려자기라고 대답하자 고종은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 없는 것이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청자는 무한정 도굴되었다. 도굴금지령이 내려진 것은 1916년의 일이다. 이것이 우리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일본과 미국으로 수많은 국보급 고려청자들이 무더기로 실려나간 내력이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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