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 국보순례

[72] 미륵사 순금사리호

yellowday 2011. 4. 5. 21:52

순금사리호

오늘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백제의 아름다움에 경탄과 존경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미의 실체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것은 불과 지난 50년간 있었던 다섯 차례의 기념비적 발굴 덕분이다. 1959년의 서산 마애불, 71년의 무령왕릉, 93년의 금동용봉대향로, 2007년의 왕흥사 사리함, 그리고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에서 출토된 순금사리호(높이 13cm·사진)이다.

6층까지 간신히 남아 있던 미륵사 서탑이 붕괴 위험에 놓여 해체수리하던 중 1층 사리공에서 출토된 이 환상적인 사리호는 말할 수 없이 화려하면서도 고귀한 품위가 있어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둥글넓적한 뚜껑이 달린 듬직한 기형의 몸체에는 아래위로 가지런한 연판무늬를 두르고 가운데에는 물고기 알처럼 생긴 어자문(魚子紋)과 인동꽃의 넝쿨무늬를 빼곡히 넣었다. 그리고 석 장으로 구성된 연꽃잎을 주문양으로 삼아 당당하면서도 시원스럽게 새겼다. 무늬의 구성이 치밀할 뿐만 아니라 점·선·면의 새김 기법도 더할 나위 없이 능숙하다.

사리공에는 194자의 순금사리봉영기도 들어 있었다. 이에 의하면 무왕 40년(639) 정월 29일에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인 백제 왕후가 이 사리를 모셨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하였으니 앞뒤 사정을 종합해 보면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착공되고, 아마도 선화공주가 사망하여 새로 맞이했을 후비(사택적덕의 딸)가 이 사리호를 봉안한 셈이 된다.

사리공에는 글자를 새긴 얇은 금판 등, 탑의 안전과 개인의 복을 기원하면서 넣은 각종 진단구(鎭檀具)가 400여 점이나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고관들이 자신의 머리에 꽂았던 은제 관식(冠飾)을 즉석에서 넣은 것도 있으니 봉안식 또한 사리호 못지않게 화려한 가운데 장엄했을 것이다. yellow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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