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세운 절로 동서 260m, 남북 640m, 대지 면적 5만평이 넘는 우리나라 최대 가람이다. 그 어느 때인가 폐사되어 무너진 석탑과 당간지주만이 이 광활한 빈터를 지키고 있었다. 미륵사 터는 1980년부터 장장 16년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로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을 갖춘 3원(院) 가람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거찰에 걸맞은 유물은 출토된 것이 별로 없었다.
미륵사지 발굴이 모두 끝나고 관람 동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2000년 10월 3일 건물 바깥쪽을 정비하던 중 북쪽 회랑 기단 옆에서 땅속에 거꾸로 박혀 있던 금동향로〈사진〉가 발견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 금동용봉대향로에 이은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기념비적 유물이었다. 높이 30㎝, 무게 7㎏으로 결손 부위가 거의 없고 금도금 상태도 양호하여 7년간의 보존처리 끝에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향로의 몸체는 넓적한 화로 모양으로 짐승 발 모양의 다리가 특이하게도 넷이 달렸고 둥근 뚜껑에는 듬직한 연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봉긋이 솟아 있다. 향로의 다리와 몸체는 사자 머리로 연결되었고 그 사이에는 손잡이 고리를 입에 물고 있는 귀면이 부착되어 마치 맹수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이에 반해 뚜껑은 조각 없이 아주 매끄러운 질감을 살리면서 동심원을 반복해서 나타내고 맨 위쪽엔 8판 연꽃무늬를 돌린 다음 연꽃봉오리 꼭지를 달았다. 뚜껑 위에는 4개의 새털구름이 새겨 있고 모두 9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향 줄기가 여기에서 피어오르게 되어 있다.
청동주물 기법과 조형 형태로 보아 당나라풍을 벤치마킹한 통일신라 명품으로 주변에서 나온 도자기 파편과 연관해 보면 858년 이후 유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때 무슨 급박한 상황이 있었기에 건물 밖 땅속에 급히 묻어둔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바람에 우리는 이런 명품을 얻게 된 셈이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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