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인의 입장에서 발해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한 왕조는 앞 시대 왕조의 역사를 기록해 줄 의무가 있다. 고려는 '삼국사기'를, 조선왕조는 '고려사'를 편찬했다. 그러나 아무도 발해의 역사를 기록해 주지 않았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지 발해의 뒤를 잇는다고 하지 않았다. 유득공은 이것이 고려 왕조의 큰 실수였다고 했다.
그리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발해 유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발해 도기 중에는 유약이 발라진 삼채(三彩)도 있다. 삼채란 납으로 만든 유약에 철·구리 등을 섞어 초록·노랑·갈색 등 세 가지 색깔이 함께 나오는 기법이다.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여 당삼채(唐三彩)가 널리 알려졌지만 발해삼채도 뛰어났다.
당나라 때 책인 '두양잡편(杜陽雜編)'을 보면 무종 황제는 발해에서 만든 순자색 그릇을 좋아하여 비부(秘府)에 놓고 약과 음식을 담아두었는데 두께가 한 치 정도지만 들어보면 마치 기러기 깃털처럼 가벼웠고 빛깔은 투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황제의 재인(才人)이 옥구슬을 던지다가 이 그릇을 조금 깨트리는 바람에 황제는 오랫동안 아쉬워했다고 한다.
발해 삼채도기 중 비교적 완벽한 유물로는 만주 영안시(寧安市) 삼령(三靈) 3호 무덤에서 출토된 삼채향로<사진>가 있다. 전이 달린 넓적한 화로 모양으로 뚜껑에는 연기 구멍이 뚫려 있고 발받침은 세 마리 사자로 되어 있다. 익산 미륵사 터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금동향로와 아주 비슷한 형태로 다리가 세 개인 점과 연기 구멍의 무늬 새김만 다를 뿐이다. 사자의 조각도 정교하고 삼채의 발색이 아주 우수한 명품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그것과는 달리 어딘지 고구려적인 듬직한 힘이 느껴진다. 그것이 발해풍이고, 발해 취향이다.
발해의 이런 삼채 기술은 뒤이은 거란족의 요(遼)나라에 계승되어 유명한 '요나라 삼채'로 발전하였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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