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2.15 23:07
- '벨빌 기도서'
중세 기독교 미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은 아름다운 필체의 글이 매혹적인 그림과 같이 어우러진 사본(Codex)이나 책의 형태인 채식필사본(彩飾筆寫本)이다. 예배에서 사용하던 성경이나 기도서가 주종인 채식필사본은 초기에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제작했고 필사본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도 성직자들이었다. 종이는 아직 유럽에서 만들어지지 않아 중국에서 수입해야만 했기 때문에 채식필사본은 보통 양피지(羊皮紙)로 제작되었다. 필사본의 표지는 성스러운 글에 적합한 귀중한 보석이나 금은으로 세공되었고 왕이나 왕비가 기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시 규모가 커지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는 13세기쯤 되면 채식필사본은 도시 장인의 공방에서도 제작되었고 왕족이나 부유한 사람들도 소유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활약한 장 퓌셀(Jean Pucelle, 활동시기 약 1300~1355년)은 당시 가장 번성하는 공방을 운영하던 채식사였다. 그가 영주 올리비에 드 클리송의 부인 잔 드 벨빌을 위해 제작한 '벨빌 기도서'(1325년)에는 구약 성서의 이야기가 묘사되었는데, 사울 왕이 긴 창으로 다윗을 위협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마치 인형의 집같이 작은 건축에는 원근법의 시도가 이루어져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3차원의 공간이 표현되었다. 그림 아랫부분에는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과, 프랑스 여왕이 거지에게 적선하는 장면이 있다. 부드럽게 명암 처리된 인물들은 아주 섬세하게 그려졌고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기도서의 글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잠자리·꿩·원숭이·나비와 같은 곤충이나 뾰족뾰족한 담쟁이덩굴이나 꽃, 또는 환상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생명체들의 묘사이다. 이들은 필사본의 종교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화가가 실제 관찰하거나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린 것이다. 종교적인 장면은 표준화된 도상과 규범을 따라야 했지만 이러한 장식 그림들에서 화가는 풍부한 상상력과 묘사를 마음껏 발휘하고 표현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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