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황금의 나라였다. 신라는 금이 풍부했고, 가공기술이 뛰어나 일본 기록에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 9세기 중엽의 이슬람 기행문인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의 '도로와 왕국 총람'에서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교도들은 이 나라의 이런 이점 때문에 영구 정착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사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신라의 황금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로 들어오고부터였다. 일제는 1918년 창녕 교동에서 9기의 고분을 2년에 걸쳐 발굴한 뒤 마차 20대와 화차(貨車) 두 대에 유물을 싣고 갔다고 한다. 그때 출토된 금동관, 금귀걸이, 금목걸이 등이 지금 도쿄박물관 오구라[小倉]기증실에 전시되어 있다.
일제는 장대한 신라 고분 하나를 왕릉으로 추정하고 발굴했다. 그러나 검 몇 자루만 나오자 실망하고 검총(劍塚)이라고 이름만 붙여놓고 끝내 버렸다. 사실 이들은 고분의 내부까지 파내려 갔던 것이 아니라 무덤 완성 후 제사지내고 묻은 겉 유물들만 발굴하고 그쳤던 것이다.
그러다 1921년 9월, 경주 시내 한복판인 노서동(路西洞)의 한 민가에서 증축공사를 하던 중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발견되어 긴급히 발굴에 들어갔다. 이 고분이 바로 금관총(金冠塚)이다. 금관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순금팔찌 12점 한 세트, 금제 허리띠, 유리그릇, 굽은 옥[曲玉] 등 각종 금은 장식품과 토기가 1만 점이나 나왔다. 구슬만 별도로 3만 점이 있었다. 금제품의 총량은 7.5kg이었다. 신라의 황금 문화가 세상에 드러나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금관총이 있는 노서동은 본래 길 건너 있는 노동동(路東洞)과 한데 붙어 있던 신라고분 지역인데 한가운데로 길을 내면서 다른 동네로 갈라놓은 것이다. 금관총을 계기로 이 노서동과 노동동 일대의 신라고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후 서봉총(瑞鳳塚),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의 발굴로 이어졌다. 그리고 발굴 때마다 수많은 순금 장신구들이 출토되어 신라의 황금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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