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총에서 금관이 출토되자 신라고분에 대한 일제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3년 뒤인 1924년에는 금관총 옆 고분 두 기를 발굴하였는데 한 곳에서 또 금관이 나왔다. 이 무덤에서는 유명한 기마인물형토기와 특이한 금방울[金鈴]이 출토되어 금령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하나의 고분에서는 많은 금속 장신구와 함께 아름다운 금신발[飾履]이 출토되어 식리총이라고 불렀다.
금관총·금령총·식리총에서 재미를 본 일제는 2년 뒤 또 하나의 고분을 발굴하기로 하였다. 직접적인 동기는 경주역에 새로 기관차고(機關車庫)를 지어야 하는데 대지 매립에 많은 흙과 자갈이 필요하자 고분 하나를 파서 충당할 목적이었다. 이 고분에서도 금관이 나왔다. 이번 금관은 머리띠에 세 마리의 봉황이 조각된 아주 특별한 구성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 무덤에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상서로운 봉황'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내력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에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신혼여행차 한국에 와서 금강산을 둘러보고 이 발굴 현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에겐 금제 허리띠를 직접 꺼내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주어졌고 이를 기념한다고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와 봉황의 봉자를 결합하여 서봉총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발굴 책임자였던 고이즈미(小泉顯夫)는 훗날 평양박물관 관장이 되었는데 그는 1935년에 자신이 발굴한 서봉총의 금관과 장신구들을 빌려 평양박물관에서 한 차례 특별전을 가졌다. 신라 금관이 처음으로 고구려 지역에서 전시된 것이었다. 성공리에 전시회를 마치고 뒤풀이가 있었는데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 금관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만찬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만 술에 취해 혼미해지자 금관을 꺼내 기생의 머리에 씌우고 금제 허리띠까지 둘러주었다. 이건 박물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금관을 쓴 평양기생 사진이 시중에 나돌다 한 신문에 실리는 바람에 비난이 쏟아지면서 결국 그는 관장 직에서 물러나고 말았고, 이 평양기생은 신라 금관을 직접 머리에 써 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진기록의 보유자가 되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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