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 국보순례

[33] 신라 금관

yellowday 2011. 4. 3. 18:32

신라 금관은 현재까지 모두 6점이 출토되었다. 그중 5점은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155호분), 쌍분인 황남대총(98호분)의 북분(北墳)에서 발굴된 것이고 1점은 경주 교동에서 도굴된 것이다. 그중 교동에서 도굴된 금관은 둥근 테에 단순히 나뭇가지를 추상화시킨 출(出)자 모양의 세움장식[立飾] 세 개만이 붙어 있고, 나머지는 여기에 지그재그로 뻗은 사슴뿔 모양 세움장식이 한 쌍씩 덧붙어 있다. 이것이 신라 금관의 기본형으로 금판에는 수십 개의 순금 영락(瓔珞·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과 파란 굽은 옥[曲玉]의 달개장식이 달려 있다. 그리고 관테 양옆에는 귀걸이 모양의 드림이 두서너 가닥씩 곁들여져 있어 세계 역사상 나타난 어느 왕관(crown)보다도 화려하고 장엄한 구성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라 금관은 왕관이 아니다. 이 여섯 개의 금관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반의 이른바 마립간 시대 유물로 이 시기 신라의 왕은 눌지·자비·소지·지증 등 김씨 4명에 불과하다. 또 서봉총은 여자의 무덤이고, 금관총은 15살 전후의 아이 무덤이다. 더욱이 부부합장의 황남대총을 보면 남자무덤(남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는데, 여자무덤(북분)에서는 오히려 금관이 출토되었다. 어느 모로 보나 신라금관은 왕관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또 금관은 피장자가 생전에 머리에 쓰던 것을 부장한 것도 아니다. 금관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상황을 보면, 지금 박물관에 있는 것처럼 세움장식들이 활짝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 위 꼭짓점에서 세모뿔 모양으로 뭉쳐져 있었다. 게다가 금관의 테두리는 머리에 얹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골의 턱 아래쪽까지 내려와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근래에 신라금관이 시조(始祖)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제관(祭官)이 쓰던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 경우도 왕관은 아니다.

본래 신라의 관모(冠帽)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비단이나 가죽 또는 자작나무로 만든 삼각형 고깔모자에 금·은·동의 새 날개 또는 쇠뿔 모양 장식을 달았다. 이런 점에서 신라 금관은 지배층의 위세품(威勢品)이었으며, 왕권이 강화되어 더 이상 거대한 무덤을 만들거나 금관으로 위세를 부릴 필요가 없어지고 불교가 공인되는 6세기 법흥왕 이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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