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5.24 23:12
우리 동네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늘어선 가로수길이 있다. 11월 초·중순 바람이라도 좀 불면 은행 잎들이 우수수 날리는데 겨울철 함박눈 쏟아지는 수준이다. 그걸 맞고 있으면 시 쓰는 사람들이 '사는 건 황홀'이라고 노래 부르는 기분도 알 것만 같다. 작년에 어느 나무 강좌에서 은행나무가 침엽수라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넓은 잎을 갖고 있지만 잎맥이 부챗살처럼 퍼져 해부학적으론 침엽수 쪽이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바퀴벌레만큼이나 오래된 생물이다. 2억7000만년 전 등장해 무수한 빙하기와 화산 폭발을 버텨내 '화석(化石)식물'로 통한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주변 2㎞ 안에 큰 은행나무가 여섯 그루 있었다. 다른 나무들은 다 그을려 죽었지만 은행나무에선 다시 움이 나와 지금껏 자라고 있다. 그 나무들은 이제 관광코스가 됐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도 은행나무로 둘러싸인 신사(神社)들은 불에 타지 않고 끄떡없이 남았다.
▶은행나무는 공해도 잘 견디고 병도 안 걸린다. 은행나무 잎은 벌레도 안 먹고 초식동물도 쳐다보지 않는다. 새도 은행 열매는 안 먹는다. 말린 은행 잎을 봉지에 담아 집안 구석구석에 두면 바퀴벌레도 없어진다고 한다. 은행 잎을 책갈피에 끼워두면 좀벌레가 덤벼들지 못한다는 얘기도 있다. 은행나무에 뭔가 해충이 싫어하는 성분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이 수수께끼를 풀면 큰 돈벌이가 된다고 보고 매달리는 학자들이 많다.
▶봄에 피는 은행나무 꽃을 본 적이 있으신지. 은행나무는 암수가 따로 있어 암나무엔 암꽃만 피고 열매가 달린다. 수나무에는 수꽃이 피고 열매는 안 열린다. 은행나무는 풍매화(風媒花)다. 수나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암꽃한테 건너간다. 구태여 벌과 나비를 유혹할 필요가 없으니 꽃이 꿀도 안 만들고 색깔이 화려하지도 않다. 4월에 어린 새 잎이 돋아날 때쯤 피는 암꽃과 수꽃은 얼핏 봐선 잎과 별 차이 없이 수수한 모양과 색깔이다.
▶서울시가 앞으로 가로수로는 수놈 은행나무만 심기로 했다. 가을에 암나무에 열리는 열매가 떨어지고 나면 도로가 지저분해지고 냄새가 좋지 않아서다. 은행 껍질엔 부틸산(酸)이 들어 있다. 음식이 장 속에서 발효되면서 나오는 성분과 같아 구린내가 난다. 그렇지만 은행 껍질을 잘 벗겨서 굽거나 기름에 튀겨 먹으면 그것만큼 고소한 맛도 드물다. 은행이 떨어질 때쯤 집게를 들고 은행을 주으러 다니는 이들도 많다. 아무리 나무라지만 암놈 수놈을 떼어놓아 종족 번식 본능을 눌러버린다는 것이 썩 개운한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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