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감금 신드롬'

yellowday 2012. 4. 21. 07:41

입력 : 2012.04.20 22:22

처녀 테레즈는 라캥 고모의 병약한 아들 카미유와 결혼해 살다 옛 애인 로랑과 걷잡을 수 없는 육욕에 빠진다. 불륜 남녀는 카미유를 센강에 밀어 넣어 죽인다. 라캥 고모는 충격을 받아 '록트 인 신드롬(Locked-in syndrome)'에 빠진다. 의식은 살아 있지만 눈·코·입 같은 얼굴 기관과 몸 기능은 완전히 정지되는 병이다. 의식까지 멈추는 뇌사(腦死)와는 다르다. 라캥은 친구들이 찾아오자 손가락 끝에 기적적인 힘을 모아 아들을 죽인 살인범의 이름을 적는다. 에밀 졸라가 1860년대에 쓴 소설 '테레즈 라캥'의 줄거리다.

▶이 소설은 불륜과 살인이라는 선정성 때문에 파문이 컸다. 한편으로 독자들은 이 자연주의 소설에서 새로운 의학 신드롬을 배웠다. '감금 신드롬'으로 번역되는 이 질환은 대개 뇌에 혈액 공급이 갑자기 중단될 때 발생한다. 오로지 눈만 움직일 수 있는 환자가 있고, 그마저 못하는 환자가 있다. 비밀을 알고 있다 해도 표현하지 못하는 병이어서 영화와 범죄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우리에겐 박찬욱 감독이 '테레즈 라캥'을 각색한 '박쥐'와 프랑스 영화 '잠수종과 나비'로 많이 알려졌다.

▶'록트 인'이란 말은 컴퓨터에도 쓴다. 컴퓨터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어떤 상태에 묶여 더이상 꼼짝 못하는 먹통 고장을 일컫는다. 시스템을 새로 시작해야만 벗어날 수 있다. 유럽집행위원회(EC)가 2010년 55개 관련 기관의 컴퓨터 운영체제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7'으로 바꾸려 하자 의원들이 들고일어났다. 670억원짜리 사업이 한 회사의 운영체제에 묶이게 된다는 이유였다. 당시 뉴스 자막이 'EC, 록트 인 신드롬에 빠지다'였다.

▶엊그제 정의화 국회의장 대행이 "몸싸움을 막겠다는 국회법 개정안이 오히려 국회를 록트 인 신드롬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눈은 말똥말똥한데 몸은 자물쇠를 잠가놓은(locked-in) 것처럼 꼼짝 못하는 국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당이든 전체 의원의 60%라는 '절대다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쟁점 의안을 처리하는 기능이 멈추게 된다는 걱정이다.

▶요즘 우리 주변엔 록트 인 신드롬이 낯설지 않다. 사회 곳곳에 고질병이 넘쳐도 누구 하나 제대로 손을 못 쓰고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다. 학교폭력, 무(無)양심 표절, 막말 조롱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지만 모두 '열중쉬어'다. 소통과 치유의 신경줄이 어디서 끊긴 것일까. 해머와 최루탄, 민생 외면으로 얼룩진 18대 국회가 끝나면 록트 인 신드롬이 벌어질 19대 국회가 기다리고 있다니 자물쇠를 채워놓은 듯 가슴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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