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2.14 22:26
20세기 가톨릭 사상가로 꼽히는 토머스 머튼은 신부(神父)였지만 선(禪)불교에 깊이 빠져 '선과 맹금(猛禽)'이란 책도 남겼다. "내가 선에 입문했을 때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이상 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선을 이해했을 때 산은 오로지 산이고, 강은 오로지 강이었다." 젊어서 방탕하게 놀다가 스물세 살에야 세례를 받은 뒤 트라피스트 수도회 신부가 된 머튼의 '산과 강'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말이다. 성철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고 나서 내놓은 첫 법어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란 말이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는 성철 스님(1912~1993)은 '단번에 깨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지향한 선승(禪僧)이었다. 성철은 "깨달은 순간에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지 않았다면 깨달았다는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성철 탄생 100년을 맞아 조계종이 3월 31일부터 성철이 수행한 24개 사찰과 암자를 순례하기로 했다. 1936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한 성철은 30년 동안 산문(山門)을 떠나는 것을 꺼려했다. 잠잘 때 눕지 않고 8년을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옛 수도승의 길을 좇았다.
▶성철은 여러 차례 기워 누더기가 된 승복을 입고 살며 "나는 못났으니까" 했다. 양말을 기워 신는 모습을 딱하게 여긴 제자가 질긴 나일론 양말을 선물한 적이 있다. 성철은 "이놈아, 중이라면 기워 입고 살 줄 알아야제"라고 호통쳤다.
▶성철은 조계종 종정이 돼서도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며 산을 떠나지 않았다. 성철은 1981년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내렸다. 정권 비판을 바랐던 사람들이 '현실 도피'라고 비난하자 성철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산중에 살면서 종정 하는 기 뭐꼬? 산중에 수행승 하나 제대로 있는 꼴을 보여주려는 것 아이가."
▶작년 11월 불교 학술대회에서 김성철 동국대 교수는 "성철은 출가자가 해야 할 일이 섣부른 현실 참여가 아니라 불교의 본질 회복이라고 판단했다"고 풀이했다. 성철이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은 "참선 잘하그래이" 한마디였다. 큰스님이 세상을 하직하는 인사 같지가 않다. 마치 학교가 파한 후 교문 앞에서 예닐곱 초등생들이 주고받는 작별인사와 다를 게 없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보리(菩提)'라던 큰스님이 우리 손에 쥐여주는 따뜻한 선물처럼 울리는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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