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과 정몽주는 친원(親元), 친명(親明)으로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를 떠받치던 두 기둥이었다. 이병주는 소설 '포은 정몽주'에서 막 관직을 시작한 정몽주가 장군·재상으로 한창 잘나가던 최영의 집을 처음 찾아가는 장면을 그렸다. '집은 기어들고 기어나야 할 정도로 초라했다. 방안에 들어갔더니 흙벽(土壁) 그대로이고 바닥엔 멍석을 깔았는데 벼룩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최영은 국왕 바로 다음 자리까지 올랐지만 늘 낡은 옷을 입었다. 집의 쌀독이 빌 때도 있었다. 권세를 이용해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은 탓이었다. 최영의 근검과 청렴은 어려서 아버지가 남긴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황금에 욕심이 많으면 옳고 그름의 판단이 흐려지고 백성을 괴롭히게 된다." 그는 '견금여석(見金如石)' 넉 자를 큰 띠에 써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최영은 스스로 깨끗했을 뿐 아니라 남이 좋은 말을 타거나 좋은 옷 입은 걸 보면 개나 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6·25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땅이었던 파주 덕물산 꼭대기에 최영을 모신 사당 '장군당'이 있었다. 이곳에선 2년에 한 번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 큰 굿을 하고 잔치를 벌였다. 그 잔치에서 먹는 돼지고기를 '성계육(成桂肉)'이라고 불렀다. 자기 욕심 채우기에 앞서 백성을 생각한 최영에 대한 존경,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최영을 죽인 이성계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성남에 있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연수센터는 동남아·아프리카·중남미의 개발도상국 공무원을 초청해 우리의 발전경험을 전수해주는 곳이다. 이곳에 최영 장군 상반신을 담은 부조상(浮彫像)이 세워졌다. 외국 공무원들에게 청렴과 부패 방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뜻이라고 한다. 부조상 아래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Look at gold as if it is a valueless stone)'는 최영의 좌우명을 한글과 영어로 새겼다.
▶어려서부터 익히 보고 들었던 최영 장군의 모습과 금언이 우리보다 개발이 더딘 나라 공무원들의 청렴 교육에 나온다니 반갑다. 이참에 경제규모는 세계 12위지만 부패인식지수는 39위에 머물고 있는 우리 현실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행여 연수생들로부터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최영 장군을 뵐 낯이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