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스탠퍼드대 대학원생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는 인터넷 웹페이지들을 찾아 띄워 주는 세계 첫 웹브라우저 프로그램 '모자이크'에 푹 빠졌다. 이들은 '모자이크'를 통해 접속한 수많은 웹사이트 목록을 대학 교과과정에 맞춰 도서관 책 분류하듯 카테고리를 나누고 정리해 학교 컴퓨터 서버에 올렸다. '제리와 데이비드의 월드와이드웹 가이드'라는 이 사이트는 곧바로 학생들 사이에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양과 파일로는 웹사이트 목록을 계속 늘리고 개선하면서 사이트 이름을 '야후'로 바꾸고 창업을 위한 투자자 모집에 나섰다. 컴퓨터 통신회사 AOL과 '모자이크'를 개발했던 넷스케이프가 200만달러를 내놓겠다며 인수 의사를 밝혀왔다. 두 사람은 "야후의 가치가 앞으로 훨씬 더 커질 수 있다"며 거절했다. 당장 100만달러씩 거머쥘 기회를 걷어찬 도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더없이 현명한 결정이었다.
▶1996년 기업 공개와 함께 야후는 인터넷기업 대표주자로 올라섰다. 2000년엔 시가총액이 1000억달러까지 치솟았고 두 사람은 수십억달러 거부(巨富)가 됐다. 둘의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 파일로는 주로 기술개발을 맡은 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반면 대만계 미국인 양은 빼어난 말솜씨를 뽐내며 야후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아시아에선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2000년대 들어 IT 거품이 꺼지면서 야후와 양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양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외부 전문가를 끌어들였어도 되돌릴 수 없었다. 양은 2007년 최고경영자로 복귀한 뒤 마이크로소프트의 475억달러 인수 제안을 거부하는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야후의 가치가 그보다 더 크다"고 주장했지만 착각이었다. 야후 주가는 더 곤두박질쳤고 이사회 압력에 밀려 양은 다시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나 양은 이사회 이사로 계속 영향력을 휘두르다 다른 이사들과 마찰을 빚었다. "회사를 살리기보다 자신의 영향력과 업적을 지키려고만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양이 엊그제 이사직을 포함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그러자 야후 주가가 뛰었다. 누군가의 퇴장을 시장(市場)이 두 손 들어 반긴다면 그보다 굴욕스러운 퇴장도 없다. 제리 양은 박수받으며 물러설 때를 놓쳤다가 굴욕을 자초했다. 기업가뿐 아니라 정치인·공직자 모두가 새겨야 할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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