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호는 빚에 몰려 있다. 시골로 이사 온 뒤 땅뙈기를 얻어 일구려 해도 생전 못 보던 사람이라 아무도 빌려주지 않는다. 춘호는 서울로 갈 차비를 마련하려고 아내에게 몸을 팔게 한다. 남편 닦달에 못 이긴 아내는 평소 추근대던 이 주사를 찾아간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유정 소설 '소낙비'의 줄거리다. 그가 쓴 '안해' '가을' '산골 나그네'도 비슷한 얘기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식민지의 바닥 삶을 그렸다.
▶43년 전 윤흥길의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회색 면류관의 계절'에는 1960년대 후반 암담했던 시절이 녹아 있다. 주인공은 군복무를 하다 갑작스레 부친 별세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 가족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 주인공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탈영을 꿈꾼다. 뒷날 작가는 "그 당시 내가 겪었던 지독한 절망과 분노는 나 혼자 속에 담아두고 있으면 큰 고질병이 될 것 같았다"고 했다.
▶2012년 벽두에 발표된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다 보니 가슴이 섬뜩할 만큼 '실직'과 '자살'이 주된 소재다. 조선일보 소설 당선작 '삼각조르기'는 실직 위기에 내몰린 직장인의 삶을 격투기 선수의 처절한 훈련과정에 빗댔다. 희곡 당선작 '그들의 약속'은 구직에 실패한 30세 여성과 파산당한 중소기업의 40대 남자가 자살 사이트를 통해 여관에서 만나는 얘기다. 남자는 여자를 설득해 돌려보낸 뒤 약을 들이켠다.
▶동아일보 소설 당선작 '치킨 런'은 통닭·피자 배달 청년이 주인공이다. 인생 막장에 내몰린 통닭 손님이 자신의 자살을 확실하게 도와주면 50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경향신문 소설 '방', 한국일보 희곡 '모기'도 비슷하다. "서민과 젊은 세대의 피를 빨아먹는 사회 시스템"에 분노를 쏟아놓는다. 당선작 열 작품을 읽었는데 아홉이 똑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87년을 헤아리는 우리나라 신춘문예 역사에서 응모작들은 언제나 그때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窓) 역할을 했다. 현실 문제를 부각시키는 세태소설과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인생소설이, 역사적 비극을 소재로 삼는 이념소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도 올해처럼 한쪽으로 쏠린 적은 드물었다. 한 심사위원은 새해 신춘문예 경향을 '꿈꾸기를 멈춘 사람들을 향한 위로'라고 했다. 정치가 손 놓아버린 일을 새내기 작가들이 대신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