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노숙인 저축왕

yellowday 2012. 1. 6. 18:47

레스토랑과 모텔을 운영하던 서모씨는 몇 년 전 사업에 실패한 뒤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딸과도 떨어져 살아야 했다. 절망에 빠져 지내던 서씨는 조치원 야산에 올라 평소 입에 대지도 않았던 소주 두 병을 마셨다. 그는 손목을 긋고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가 이튿날 새벽 등산객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그날 이후 서씨는 "새 생명을 얻었으니 다시 출발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노숙인 보호시설에 들어간 뒤 서울시에서 개설한 '희망의 인문학' 강좌에도 등록했다. 난생 처음 대학 교수로부터 소크라테스·헤겔·공자의 사상을 배우고 문학 강좌도 들었다.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삶의 목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는 공공근로로 번 돈을 아껴 한 달에 50만원씩 저축하면서 아이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시가 23개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노숙인 1222명의 저축 실적을 살펴보고 그중 70명을 저축왕으로 선발했다. 이들은 지난 8개월 동안 모두 4억6000만원을 벌었고 절반이 넘는 2억6000만원을 저축했다. 한 사람이 한 달 평균 82만원을 벌어 47만원을 저축한 셈이다. 국내 최하위 20% 가구의 한 달 평균 소득이 121만원이고 지출은 122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노력이고 절약이다.

▶저축왕으로 뽑힌 노숙인 중엔 한국에 시집왔다가 남편의 손찌검을 견디다 못해 거리로 나선 필리핀 여성이 있다. 잘나가는 영어학원 강사였다가 주식 투자로 재산을 몽땅 날린 뒤 가족과 헤어진 가장,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회사가 부도난 뒤 술로 날을 지새우다 한강에 투신했던 사람도 있다.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을 감추고 초등학교 3학년 딸이 교통사고로 앞서 간 뒤 우울증에 걸려 3년간 술에 빠졌다가 재활 치료와 노숙 생활을 반복하던 여성도 있다.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동력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인간으로서의 자존, 삶에 대한 애착이다. '희망의 인문학' 같은 강좌를 듣고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봐야겠다"는 용기와 자활(自活)의지를 얻었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스스로 재활의 계단을 쌓아 가고 있는 이들에게 더 큰 사회적 격려와 후원이 뒤따르면 좋겠다. 우리 사회의 노숙인 문제를 풀 수 있는 힌트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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