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이준 열사 기념관

yellowday 2011. 11. 22. 21:41

"코레(한국)의 특사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머물고 있는 숙소의 명함을 내게 건넸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부의장 드 보포트의 일기 중 일부다. 고종의 밀명을 받고 온 이준 특사 일행이 머문 곳은 드용 호텔이었다. 만국평화회의장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했지만 특사들은 일제(日帝)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특사들은 호소문을 나눠주고 장외 연설로 각국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유럽 언론들이 일본을 비판하는 기사와 만평을 실었다. 7월 14일 이준 열사가 숙소에서 마흔여덟에 세상을 떴다. 현지 의사가 쓴 사망진단서에는 사인(死因)이 적혀 있지 않았다. 황성신문은 '할복자살'을, 일제는 '병사(病死)'를 각각 주장했다. 최근 우리 학계에선 '단식 자살' 주장도 나왔다. 분명한 것은 이준 열사가 "내 조국을 도와주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호텔에서 분사(憤死)했다는 것이다.

▶열사가 숨진 호텔은 80년 넘게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92년 헐릴 처지가 됐다. 현지에서 1972년부터 사업을 하던 교민 이기항·송창주씨 부부가 사재 20만달러를 들여 건물을 사들였다. 이씨 부부는 "헤이그시청에 한국 역사 유적지로 보존해야 한다는 청원서를 내고 직접 구입했다"고 했다. 1995년 전경련이 낸 4억원을 보태 개보수를 거친 뒤 이준 열사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이씨 부부는 네덜란드·일본·러시아 문서보관소를 뒤져 수집한 관련 자료를 기념관에 모았다. 이준 열사가 묵었던 방을 보존하고, 특사들의 유품과 사진, 고종의 신임장, 을사늑약을 비판한 외국 신문을 전시해 왔다. 어느 일본인 관람객이 평화 메시지와 함께 기증한 1000마리 종이학도 있다. 기념관엔 해마다 2000여명이 찾아온다.

▶이씨 부부는 2006년부터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기 전까지 입장료 수입으로만 버텼다. 300년 된 건물이라 곳곳에 물이 새서 유지비가 많이 든다. 이씨 부부가 모자라는 운영비를 계속 대왔지만 이제 일흔다섯, 일흔두 살에 접어든 노부부가 더 관리할 여력이 없다고 한다. 부부는 "1층을 폐허처럼 방치해 이곳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다. 정부나 대기업이 매입하면 여든 살까지라도 이곳 구석에서 일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나라가 할 일을 16년 동안 대신한 노부부가 허리를 펴고 살도록 우리 사회가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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