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지금부터 50년이 훌쩍 넘은 젊었던 시절에 기숙사 생활을 한적이 있었다.
거의가 경남 각지에서 친구들이 배움의 뜻을 품고 모여든 곳(부산)이다.
우린 일정액의 기숙사비를 내고 숙식을 같이 하며 화기애애하게 생활을 하였는데
그 중 영덕이 고향인 사감언니로 뽑힌 영자언니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문둥이 콧구멍에 마늘을 빼 먹었는지 우리는 항상 배가 고팠다.
영자언니가 시어머니처럼 시장비를 주면 우린 조를 짜서 스스로가 시장을 봐와 밥을 지어 먹곤 하였다
아무리 아껴 장을 봐와도 배는 늘 고팠지만 누구 하나 의심하는 친구는 없었다.
작은 돈으로 숙식을 해결하려니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넘어 갔었다.
그러던 중 영자언니가 졸업을 하고 내가 그 뒤를 이어 곳간열쇄를 받게 되었다.
곳간이라야 한 달 먹을 쌀과 연탄 그리고 찬거리를 살 약간의 돈만 잘 간수하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전례를 따랐지만, 밥은 조금 넉넉히 지어 한 달을 살고나니 이게 웬일인가 약간의 돈이 남는것이었다.
남는 돈은 따로 모아 모았다. 그러다 반년쯤 지나고나니 상당한 돈이 모였다.
난 지금도 여기저기 곳곳을 찾아 다니는걸 좋아하지만 그 때 부터 그런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따로 모인 돈으로 태종대며 해운대, 경주불국사, 양산통도사등 이름난 곳으로 월례행사하듯 소풍을 가기도 하였다.
배고프지 않게 먹고 소풍까지 가게되니 다른 친구들도 모두 좋아하였다.
그 중 진주여고를 졸업한 진숙이란 친구는 진실한 기독교이이었는데 일요일만 되면
그 친구를 따라 교회도 가곤 하였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와 나와 단짝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연락할 길이 없다.
하루는 저녘밥을 먹었는데도 반배도 차지 않아 기숙사와 걸어서 3~4십분 떨어진 고향친구 고모네 집에
누룽지라도 얻어 먹을 수 있을까하고 길을 나섰다.
막 저녘상을 물리고 설겆이가 끝난 후여서 그리고 내가 배가 고파 온줄은 꿈에도 몰랐을것이다.
고향친구들 중 부잣집 딸로 소문이 나 있었으니까
돌아오는 길은 배고픔이 더해 서러움이 한 바가지였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생활비로는 따로 간식 하나를 사 먹을 수가 없었기에
용돈이 모자라니 더 보내달라는 말은 언감생심 할 수 없었다. 난 장녀였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일본상선을 타며 충분한 생활로 비교적 부유하게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노후에 건강이 안좋아지셔서 병원비랑 돈들어 갈곳이 많았기에 나까지 보탤순 없었다.)
일본소설 '오싱'이란 책을 보면 주인공인 오싱이 식당을 운영하여 슈퍼마켓 7개를 갖고 있는 자전적 성공소설이다.
전후 일본사회상이 잘 그려져 있고 어려운 환경을 잘 개척한 일상들이 한국전쟁이후 우리나라와 많이 닮은...
비록 밥을 팔았지만 돈만 벌려는 정신으로 식당을 하면 안된다 하였다.
배고픈 사람 끼니를 해결해 준다는 자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할 만큼 철저한
밥철학을 가진 전형적 일본 여성이었다.
노후대책으로 조그맣게 하고 있는 내 일에도 오싱의 밥철학을 대입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집 밥솥엔 항상 밥이 대기중이다. 왜? 배 고프면 먹을려고!
설음중에 뭐니뭐니해도 배 고픈 설음이 제일 크다는 어른들 말씀을 절감한 그 때 그 시절!
지금은 먹을게 넘처나는 현실이지만 아직도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많이 있다는걸 잊지맙시다!
그리고 영자언니! 묻고싶네요! 언니는 왜 우리들 배를 그렇게도 모질게 다이어트 시켰나요?
그 때 사진보면 언니 덕분?에 군살 하나없이 제법 날씬한 몸매를 유지한것 같아
한 편으론 고맙기도 해요! ㅎㅎ
지난 이야기 22'1/25 yellow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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