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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별곡(竹溪別曲) /

yellowday 2017. 12. 24. 07:06

죽계별곡(竹溪別曲)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


제1장

죽령남 영가북 소백산전
천재흥망 일양풍류 순정성리
타대무은 취화봉 왕자장태
위양작중흥경 기하여
청풍두각 양국두어
위 산수청고경 기하여


제2장

숙수루 복전대 승림정자
초암동 욱금계 취원루상
반취반성 홍백화개 산우이량
위 유흥경 기하여
고양주도 주이삼천
위 휴수상유경 기하여


제3장

채봉비 옥용반 벽산송록
지필봉 연묵지 제은향교
심취육경 지궁천고 부자문도
위 춘송하현경 기하여
연년삼월 장정로량
위 가갈영신경 기하여


제4장

초산효 소운영 산원가절
화란만 위군개 유음곡
망대중래 독의란간 신앵성리
위 일타록운 수미절
천생절염 소홍시
위 천리상사 우내하


제5장

홍행분분 방초처처 준전영일
녹수음음 화각침침 금상훈풍
황국단풍 금수춘산 홍비후량
위 설월교광경 기하여
중흥성대 장락태평
위 사절유시사이다


1장

죽령의 남쪽과 영가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천 년을 두고 고려가 흥하고·신라가 망하는 동안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 안에,
다른 데 없는 취화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왕의 안태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청백지풍을 지닌 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아! 산높고 물맑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2장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의 정자,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와 욱금계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들에서,
술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습욱의 고양지에 노는 술꾼들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객처럼,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3장

산새는 채봉이 날아 오르련듯·지세는 옥룡이 빙빙 돌아 서린듯, 푸른 소나무 우거진 산기슭을 안고, 향교 앞 지필봉(영귀봉)과 그 앞에는 연묵지로 문방사우를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항상 마음과 뜻은 육경에 스며들게 하고, 그들 뜻은 천고성현을 궁구하며 부자를 배우는 제자들이여, 아! 봄에는 가악의 편장을 읊고 여름에는 시장을 음절에 맞추어 타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해마다 삼월이 오면 긴 노정으로. 아! 큰소리치며 신임자를 맞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4장

초산효와 소운영이라는 기녀들과 동산 후원에서 노닐던 좋은 시절에,
꽃은 만발하여 난만한데, 그대 위해 훤히 트인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로,
바삐 거듭 오길 기다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새로 나온 꾀꼴새 울음 속에,
아! 한 떨기 꽃처럼 검은 머릿결이 구름처럼 흘러내려 끓임없는데,
타고나 천하절색인 小桃紅맘 때 쯤이면
아! 천리 먼 곳에 두고 서로 그리워함을, 또 어찌 하겠습니까? 


5장

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동이 앞에서 긴 봄 날 하루놀이와,
푸른 나무가 우거진 속에 단청올린 다락은 깊고도 그윽한데, 거문고 타는 위로 불어오는 여름의 훈풍,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 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라,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비치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대평을 즐기느니,
아! 사철을 즐거이 놉시다그려.  
  


5.작자와 창작연대

안축(安軸 : 1287-1348)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순흥 죽계(오늘날의 풍기(豊基))출생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당지(當之)이며, 호는 근재(謹齎)이다. 아버지는 안석(安碩)이다. 신흥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 지었다.


문과에 급제해서 전주사록(全州司祿), 사헌규정(司憲糾正), 단양부주부(丹陽附主簿)를 지냈고, 1324년(충숙왕11)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해서 그 곳 요양로(療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는 않았다. 고려로 돌아와서 성균학정(成均學正),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無使)로 파견되었다. 이 때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이 저작에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1332년(충숙왕 복위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당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지만, 내시의 미움을 사서 다시 파직당했다. 


충혜왕이 복직하자 다시 전법판서, 감찰대부(監察大夫)등에 등용되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를 지내고,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어 양전(量田)행정에 참여하였다.

그 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개찬하였고, 또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경기체가인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어 문학적 명성을 날렸다.

흥년군(興寧君)에 봉해진 뒤 죽었다.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죽계별곡」은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작자의 고향 순흥이 순흥부로 승격이 되고, 거기 충목왕의 태(胎)가 안장되는 일이 작가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충목왕 4년(1348)에 있었던 것을 증거로 해서, 그 해가 창작연대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 두 가지 사실이 작품 창작연대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왕의 태가 안장된 일은 작품에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안축이 자기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성자 : 국어교육과 정언실·조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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