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麗的 詩 ·人

정호승 시 모음

yellowday 2017. 10. 2. 09:27

친구에게 / 정호승 젖은 우산을 접듯 그렇게 나를 접지 말아줘 비 오는 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우산을 그대로 접으면 젖은 우산이 밤새워 불을 지피느라 그 얼마나 춥고 외롭겠니
젖은 우산을 활짝 펴 마당 한가운데 펼쳐놓듯 친구여 나를 활짝 펴 그대 안에 갖다 놓아줘 풀 향기를 맡으며 햇살에 온 몸을 말릴 때까지 

 

그대 안에 그렇게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가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읹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 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정호승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이별노래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가을 꽃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이제는 지는 꽃도 아름답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것이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말자 꽃이여 

 

‘구두 닦는 소년’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짖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닦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닦는다

이 세상 별볓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묵숨 위에 내려앉은 먼지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매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발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 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강변 역에서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 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 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새벽 편지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끝끝내

정호승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니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가
 
 
가을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그는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움녕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 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 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폭포 앞에서

정호승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미안하다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슬픔으로 가는 길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감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리기다 소나무

정호승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정호승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소록도에서 온 편지

정호승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개동백나무에 개동백이 피고
바다 위로 보르말이 떠오르는 밤
손 없는 손으로 동백꽃잎마다 주워
한 잎 두 잎 바다에 띄우나니 받으시라
팔 없는 팔로 허리를 두르고
발 없는 발로 함께 걷던 바닷가를
동백꽃잎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시라


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등신불

정호승

강물도 없이 강이 흐르네
하늘도 없이 눈이 내리네
사랑도 없이 나는 살았네

모래를 삶아 밥을 해먹고
모래를 짜서 물을 마셨네

잘 가게
뒤돌아보지 말게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네

눈이 오는 날
가끔 들르게

바람도 무덤이 없고
꽃들도 무덤이 없네



사랑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정동진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희망은 아름답다

정호승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희망을 낳지 않는데
나그네여, 그 날 밤 총소리에 쫓기기며 길을 잃고
죽음의 산길 타던 나그네여
바다가 있어야만 산은 아름답고
별이 빛나야만 창은 아름답다
희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창은 들의 꽃
바람 부는 대로 피었다 사라지는 한 순례자


 
겨울 강에서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 강 강 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바닷가에 대하여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눈부처

정호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저무는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인생의 눈부처 되리
내 죽을 때 망초 꽃 되어
그대 맑은 눈동자 눈부처 되리..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 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얼씨구나 부등켜 안고 웃어 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가난한 사람에게

정호승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밖에 걸어 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을 꽃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 꽃이여


 
사랑

정호승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 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너에게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까닭 / 정호승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봄눈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정호승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 내린다.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 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 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안개꽃

정호승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 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 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내 마음속의 마음이

정호승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내 목을 베어 가십시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베어낸 내 목을
평생토록 베개로 삼아주십시오
그래도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시 칼로 베개를 내려쳐주십시오.
눈 내리는 그믐날 밤
기차역 부근에서
내 마음속의 마음이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호승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



반지의 의미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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