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亭子

현모양처는 잊어라, '조선의 워킹맘' 신사임당

yellowday 2017. 1. 25. 07:32
  • 입력 : 2017.01.25 03:04

- 문화계에 부는 사임당 열풍
이영애 복귀작 '사임당' 부터 소설·역사서·그림 전시 등 여인으로서 신사임당 재조명
"현모양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수퍼우먼' 요구하는 사회상 반영"

"500년 전 신사임당이 5만원권과 같은 박제된 이미지를 원했을까요?"

'대장금'(2003~2004) 이후 13년 만에 드라마 주연으로 돌아온 이영애는 담담했다. 그가 복귀작으로 선택한 작품은 SBS '사임당, 빛의 일기'. 미술사 대학 강사인 현대의 워킹맘(일하는 엄마)과 조선시대 신사임당의 삶이 시대를 뛰어넘어 맞물린다는 내용이다. 26일 첫 방송을 앞두고 24일 열린 제작 발표회에서 이영애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자로서, 엄마로서 고민이 다 똑같다는 것을 느꼈다"며 "어머니로서, 여인으로서 다양한 신사임당의 색깔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드라마는 방송은 물론 문학·출판·미술계에서도 불고 있는 사임당 열풍의 진원지다. 최근 들어 신사임당을 소재로 한 소설·역사서가 쏟아졌고, 설을 앞두고 당대 '천재 여성 화가'라고 한 사임당의 그림들이 일반에 공개된다. '현모양처'라는 신화 속에 갇혔던 신사임당이 다시 떠오른 까닭은 뭘까.

현모양처 아닌, 인간 사임당을 조명하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문화계 최대 이슈로 떠오른 젠더와 페미니즘이 영향을 미쳤다고 입을 모은다. 현모양처, 한국의 전통적 어머니상이라 칭송받아온 사임당이 남성 중심 유교 사회에서 주체성을 잃지 않은 여인상으로 재조명되는 이유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작년 11월 펴낸 '사임당전' 집필 의도를 "사임당이라는 인물이 실제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고 소개했다. "호사 취미로 예술을 즐기며 호강한 귀족 여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버리자 또 하나의 '여자의 일생'이 거기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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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신사임당의‘초충도’(왼쪽 위). 26일부터 방영되는 SBS 드라마‘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이영애가 연기하는 미술사 강사‘서지윤’이 클럽에서 춤추는 장면(오른쪽 사진). 영화‘친절한 금자씨’주인공처럼 분장했다. 이영애는 조선 시대 신사임당(왼쪽 아래 사진)까지 1인 2역을 맡았다. /그룹에이트
연구자 5인의 글을 묶은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은 신사임당이 시대의 욕망을 투영하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고 강조한다. 조선시대에는 현모양처로 묘사되다가 일제강점기 들어서는 가정을 지키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총후(銃後) 부인'으로까지 왜곡된다는 것이다.

소설가 권지예가 펴낸 '사임당의 붉은 비단보'는 더 파격적이다. 딸만 다섯 둔 반가(班家)의 둘째 딸이었던 사임당은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 평생 그 남자 품을 온 세상으로 알다가 죽어야 행복한 거야" 하시던 어머니 말씀엔 고개를 가로저었던 여인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떠나보내면서는 몸부림쳤다. "이대로 어찌 평생을 산단 말인가. 이 꽉 막힌 수틀이 웬 말이고, 고상연한 그림은 다 무엇이며, 금수 같은 마음으로 글은 읽어 무엇하나."

사임당 열풍, 또 다른 수퍼우먼 신드롬?

24일부터 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임당, 그녀의 화원'전(6월까지)은 사임당을 조선이 낳은 천재 화가로 재조명한다. 대학자 율곡을 키운 어머니 이전에 선비들은 물론 왕실과 서민들까지 감탄했던 그림을 그린 예술가였다는 게 전시 초점이다. 숙종 임금은 "풀이며 벌레며 그 모양 너무 닮아/ 부인이 그려낸 것 어찌 그리 교묘할꼬/ 그 그림 모사하여 대전 안에 병풍 쳤네"라고 치하했다. 전시에는 사임당의 초충도 14점과 송시열이 '송자대전'에서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 힘을 빌려 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평했다는 '묵란도'가 선보인다.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은 "자녀 교육에 살림, 시와 그림까지 그리며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사임당은 요즘 시대의 워킹맘이나 다름없다"며 "붓질 한 번으로 찍어낸 듯 그리는 사임당 특유의 필법이 보여주듯 여군자의 기백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임당 빛의 일기'의 박은령 작가 또한 "아이가 7명에, 자기 예술 세계를 구현하면서 가정 경제를 이끄는 여성의 내면이 어떻게 고요하기만 했을까. 결국 조선의 워킹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사 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필자 중 하나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수진 학예연구관은 이를 '신(新)현모양처'라고 표현했다. 과거의 현모양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외모까지 아름다운 '수퍼우먼' 모습을 여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 김 연구관은 "이 또한 판타지이지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기에 신사임당이 다시 불려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