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亭子

매창 만나는 날

yellowday 2017. 3. 1. 05:35

입력 : 2017.02.28 03:04

길해연·배우
길해연·배우
"아이고, 여기 있었구려."

오래 헤어져 있던 정인을 만난 것처럼 책 한 권을 얼싸안고 표지를 어루만진다.
좁은 방 핑계로 어머님이 상자 속에 가두어 다락으로 쫓아낸 책들 속에서 간신히 구해낸 책이다.

'매창(梅窓·1573~1610) 전집'. 어찌어찌 부안을 갔고 발길 따라 들른 곳이 매창공원이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매창 시비 앞에서 홀린 듯 한참을 서성거렸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화우(梨花雨)' 시비 앞에서 알은 척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애끊는 정에 머리칼이 세고 가락지도 안 맞는다며
그리움을 토해내는 '임 생각' 앞에서는 "에고…. 이 일을 어쩔꼬" 혀를 차며 시비를 가만히 쓸어 보기도 했다.
그런 우리 일행을 지켜보시던 공원 관계자 한 분이 여섯 번째 개정판이라며 '매창 전집'을 선물해 주신 것이다.
가볍게 떠난 여행이라 손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섰던 터라 거의 1000쪽이나 되는 매창 전집은 종이백에 담겨
내 품 안에서 함께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만난 인연이 매창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그녀의 기록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 이유가 또 있다. 자식도 제자도 없이 기생의 신분을 한탄하며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매창의 시를 살려 놓은 것이 부풍시사(扶風詩社; 부안의 시인 모임)의 촌로들이었다는 점이다.

"왕후장상의 묘비도 두 번 세우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유독 그대의 묘비만은 항상 서민 대중의 손 에 의하여 새롭게 세워져 내려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라고 한 정비석 선생의 말처럼 귀한 글 남겨 주신 분들께 엎디어 절이라도 하고픈 심정이다.

"미안하다, 미안해." 눅눅해진 책장을 쓸어 말리며 나는 달력을 펴든다. 일정 없는 어느 날 훌쩍 부안으로 달려가리라, 다짐하며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칸에 '매창 만나는 날'이라고 써 넣는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