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 Korea

임진왜란 때 고니시가 순천에 지었던 순천왜성(順天倭城)

yellowday 2016. 2. 25. 15:01
등록일 : 2016-02-25 09:36   |  수정일 : 2016-02-25 10:36

"16세기 후반 오랜 세월의 전란을 제패하고 일본천하를 자신의 손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조선과 중국을
지배하려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1590년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길을 내라' 즉, 향도정명(嚮導征明)을 내세운다. 동아시아의
정세를 잘못 판단한 '히데요시'는 조선이 거부하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쟁을 준비한다. 조선침략의 전진기지이자 총사령부의 본진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 바로 규슈에 있는 나고야(名護屋) 성(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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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만 남아있는 규슈의 나고야성터-

일본인 '카도와키 마사토(門脇正人)'씨가 쓴 <조선인 가도(街道)를 가다>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해서 나고야 성에 집결한 전국의 다이묘(大名)는 130명이 넘었다. 그들은 나고야 성을 중심으로 반경 3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구릉에 진영을 구축했다.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조선 침략을 위한 야욕의 불을 지핀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제1군에서 제9군까지 15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가 맡은 제1군이
1592년 4월12일 백 여척의 배에 나눠 타고 쓰시마를 출발한 다음날 부산에 상륙했다. 그 후...
 
정유재란...'히데요시'의 재침략
 
1597년 2월 '히데요시'는 14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조선을 재침략했다. 정유재란이 시작된 것이다. 정유재란은 당초부터 일본군이 불리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凊正, 1562-1611)'의 부대가 12월 말에서 1월 초까지 울산에 성을 쌓고 지구전을 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퇴각한다. 순천성에서 퇴각하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대와 이순신 장군이 일전을
벌인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11월 26일 '고니시(小西)'의 군대가 철퇴함으로써 7년간의 침략 전쟁은 막을 내린다.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다.>
 
필자는 이런 전쟁의 역사를 더듬어보기 위해서 지난 주말 오후 전남 순천에 갔다. 이유도 있었다. '무안 공항'과 일본의 '기타규슈' 간 항로가
개설됨에 따라 일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자문을 위해서다. 필자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으나 일본인 '오오야마 미요(大山美代·48)'씨가 동행했다.
 
순천왜성(順天倭城)-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구축한 것이어서 '왜성'이라 부른다.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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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왜기공도를 설명하는 장진배 해설사

필자는 성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화관광 해설사 '장진배'씨와 만났다. 봄을 재촉하려는 듯 그의 옷 색깔이 '봄의 전도사' 같았다.
장 해설사는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부터 설명했다.
 
"자, 이 그림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그림 속에 그 당시의 전투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74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 교수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필자의 본능적인 궁금증.
 
"이 그림은 누가 그렸나요?"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그림 밑에 쓰여 있는 일본인 '나카무라(中村仁實)'라는 사람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그는 필사본을 그린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록은 중요했다. 그림 한 장을 통해서 당시의 군대의 배치와 규모에 대한 이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필자 일행은 해설사를
따라서 성터로 올라갔다. 성터에는 역사의 아픈 흔적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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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門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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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 입구


이 문지는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출입문이다. 문지 옆으로는 해자(垓字)를 만들고 바다 물을 끌어들여 방어에 치중했던

것이다. 장진배 해설사는 성(城)의 복원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성터는 2006년부터 일본의 기술자를 불러 복원하기 시작했고, 아직도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은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습니다. 일본의 성은 기초없이 바로 쌓아 올립니다."

"입구에 있는 화장실의 물이 지하수입니다. 이 성안에서 물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것도 성을 세우는데 있어서 좋은 여건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해설사는 하나라도 놓지지 않으려는 듯 계속해서 말을 하면서 천수기단(天守基壇)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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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기단

"이곳은 천수각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정왜기공도'를 보면 5층 규모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천수기단도 오랜 세월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서 보수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천수기단 위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제철소가 들어서고 집이 지어지는 등 '전쟁터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400년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해설사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조선, 명나라, 왜군의 배치에 대해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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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야마 미요씨
필자와 순천왜성을 돌아본 일본인 '미요(美代)'씨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피력했다.
 
"일본인의 입장으로서도 치욕(恥辱)의 역사를 복원한 순천시에 감사드립니다.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상황을 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에게도 많은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침략은 욕심에서 비롯되니까요."
성터를 돌아본 필자 일행은 이순신 사당인 충무사로 갔다. 거기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의 비(碑)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석에 대한 글을 그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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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행장비
<이 비석은 정유재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순천왜성에 주둔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군이 성내 천수대에 설치하였으나, 광복이후 지역주민들이 넘어뜨려 주변 농경지에 있던 것을 해룡면 사무소에 보관해 오다가 이곳으로 옮겼다. 충무공의 얼이 깃들어 있는 이곳에 비를 옮긴 이유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후손들이 다시는 겪지 않도록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순천시의 고뇌의 흔적이 들어있는 글이었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 시절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1937-1937)' 당시 육군 중장이 세웠다. 후일 그는  33대 일본 총리가 됐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했던가.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조닷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