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인생이라는 '고스톱', 스톱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yellowday 2016. 2. 12. 07:30

입력 : 2016.02.11 10:00

“71일 동안 홀로 900마일(1,448km)을 걸었다. 서서히 약화된 내 체력이 드디어 오늘 바닥났다. 이 여행을 여기서 끝내게 된 게 슬프다. 목표점이 이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지난해 11월 세계 최초로 외부지원 없는 단독 남극탐험에 나섰던 영국인 헨리 워슬리의 마지막 글이다. 남극점을 무사히 통과한 그는 도착점으로 향하다가 불과 48km를 앞두고 기상악화와 체력 고갈로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사흘 후인 지난 1월말께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80일 정도면 성공하리라 기대됐던 탐험이었다.

얼마 전 이 뉴스를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영국의 전설적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의 실패를 100년 만에 성공으로 재현하려던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실패는 ‘성공보다 더 위대한 실패’로서 지금도 하버드대학의 MBA 과정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역사사례로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워슬리는 섀클턴이 이끌었던 28명 대원 중 한 명의 후손이기도 해서, 이번 탐험을 더욱 의미 있게 지켜보던 터였다. 섀클턴은 1916년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남극을 탐험하다가 빙하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그는 온갖 역경을 헤쳐 가며 대원들을 이끌고 2년에 걸쳐 남극을 걸어서 탈출했다. 전원 무사 생환하는 기적을 이룬 리더로서 그의 ‘위기탈출 10계명’은 현재도 변치 않는 가치를 발하고 있다. ‘긍정적인 목표를 잊지 마라’, ‘리더가 솔선수범하라’, ‘낙관과 자기 확신을 가져라’ 등등 모두가 금과옥조지만, 10번째의 ‘절대 포기하지 마라’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꼽힌다. 포기하지 않는 한 기회는 오고, 포기하지 않는 한 미래는 열려 있다, 위기탈출과 극복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스톱’이란 레드카드

실은 남극 탐험이란 목표를 포기한 섀클턴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실패가 성공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되고 있는 사실은 무조건 목표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능사만은 아님을 말해준다.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해서 목표를 멈추고, 다른 목표로 바꿔 나아갈 수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여러 사람의 생명이 걸린 극한 상황에서야말로 그럴 것이다. 비록 원래 목표는 포기해 실패했을지라도 끝까지 전원 생존을 이뤄내는 것, 그만큼 가치 있는 성공이 어디 있을까. 섀클턴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진짜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바로 ‘고(go)’와 ‘스톱(stop)’의 바른 판단과 추진을 통해서다. 워슬리도 조금만 일찍 스톱했더라면 생명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탐험에 나서 섀클턴이 못 다한 남극 횡단을 ‘무지원’ ‘단독’이란 새로운 기록까지 더해 이뤘을지도 모른다. 좀 더 가면 성공이라는 욕심이 그로 하여금 스톱을 주저하게 만든 건 아닐까. 저 먼 나라의 낯선 탐험가 워슬리의 죽음이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보다 내 가슴에 더 크게 와 닿는다. 나 또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순간순간 고와 스톱을 제때 못하며 살고 있어서일 게다.

지난 1월 초 열린 한 신년음악회는 새삼 ‘고스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국내 성악가들이 다수 출연한 무대였다. 어깨를 다 드러낸 붉은 드레스로 눈길을 끈 한 중견 성악가의 차례가 됐다. 무대 중앙에 서서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자꾸 피아노 반주자 뒤로 위치를 옮겨 갔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만 가사를 잊어버려 피아노 악보대에서 가사를 엿보려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그녀는 반주를 따라 웅얼거리는 식으로 겨우 노래를 마쳤다. 무대에서 가사를 잊은 경우를 처음 본 내게는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음악회가 끝난 후 객석을 떠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노래가 아닌 옷으로 한몫 보려 했나. 가창력도 시원찮은데다 가사까지 까먹네.” “진작 무대를 떠날 때가 된 거 아냐?” 그 성악가가 들었다면 참으로 뼈아플 스톱이란 레드카드를 날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년에도 스톱 아닌 고의 무대를 이어가고자 하지는 않을까. 관객은 냉혹하지만, 자신에게 스스로 그리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고보다는 스톱을 거는 것이 언제나 더 어려운 일 같다. 몇몇 기업인들이나 정치인들을 보면 그렇다.


‘노욕’, ‘노탐’

스톱을 모르다가 추락한 한 토종 커피 프랜차이즈의 기업인이 우선 떠오른다. 그는 1호점을 연지 불과 4년 만에 매장 수를 800개로 늘려 국내 1위를 자랑했고, 해외진출까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반면 커피 맛에서는 타 업체에 뒤진다는 평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질주를 멈추고, 브랜드의 기본인 커피 맛을 비롯해 내실부터 다졌어야 했다. 뒤늦게 그의 고와 스톱 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전문경영인을 들였지만, 이 기업이 예전의 기세를 회복하기는 어려우리란 전망이다.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가 된 것이다.

정치인 가운데도 스톱을 모르는 이들이 있다. 언론을 통해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의 면면을 대하노라면, 이제 그만 좀 보고 들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도 있다. 나 자신도 ‘고스톱’이 잘 안 되면서 누구를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마는,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그 대표되는 정치인들에 대해 말과 표로써 평할 권리가 있으니 하는 얘기다. 스톱해야할 것 같은 정치인 본인은 “국민을 위해” 오는 4월 총선에서도 고를 외칠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늙어가며 스톱을 모르면 ‘노욕(老慾)’이니, ‘노탐(老貪)’으로 추하게 보일까 두렵다.

사람의 욕구 가운데 가장 놓기 힘든 게 명예욕이란 말을 나이 들어갈수록 실감한다. 백세 인생 시대에 늙어서도 뭔가 할 수 있다면 좋다. 그런데 작은 단체에서조차 감투에 급급해하는 노년들을 왕왕 보게 된다. 모든 사리판단에 의혹하지 않아 불혹 마흔이요, 하늘의 뜻을 깨달아 지천명 쉰이며, 모든 일을 들으면 마음이 통하여 거스름이 없어 이순 예순이라 했다. 공자의 이 말씀대로라면 마흔부터는 고와 스톱에 능할 법하건만, 누가 “고스톱 잘 하냐”고 내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화투의 고스톱에도 문외한이지만, 인생의 ‘고스톱’ 역시 아직도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성진선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