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2.16 09:10 | 수정 : 2016.02.16 09:23
한국 미술의 귀재(鬼才) 이중섭을 다시 보는 뜻깊은 전시가 열린다.
조선일보사와 국립현대미술관 공동 주최로 6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
올해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민 화가' 이중섭(1916~1956)이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다. 하지만, 우리는 이중섭을 너무 몰랐고, 또 홀대했다.
단적으로 국공립미술관에서 이중섭 개인전이 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중섭의 흔적을 추적할 자료도 변변찮다.
한국 미술의 귀재(鬼才) 이중섭을 다시 보는 뜻깊은 전시가 열린다. 조선일보사와 국립현대미술관 공동 주최로
6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과 1988년 '이중섭미술상'을 제정해 28년째 그의 예술혼을 기리는 조선일보가 함께 여는 국민 화가의 전시답게 최대 규모로 열린다. MoMA(뉴욕현대미술관)가 소장한 은지화 3점을 비롯해 국내외 미술관 소장품, 개인 소장자가 가지고 있어 일반인들은 보기 어려운 작품 등 총 150여점이 덕수궁으로 총집합할 예정이다. 이렇게 많은 이중섭의 작품이 한데 모이는 건 1986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이중섭 30주기전' 이후 30년 만이다.
이번 전시 취지 중 하나는 '국민과 함께하는 이중섭 찾기'다. 지면을 통해 소장처가 불확실한 작품을 독자와 함께 찾아
전시장으로 초대할 계획이다. 관객이 준비에 참여하는 쌍방향 전시인 셈이다.
1차로 도록에는 간간이 보이나 정작 어디 있는지 알 길 없는 대표작 2점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하나는 1950년대 초반 작품으로 알려진 '피란민과 첫눈(세로 32.4㎝·가로 49.7㎝, 종이에 유채)'. 삶의 터전을 잃고 길바닥에 나앉은 피란민 위로 속절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온 힘으로 날갯짓하며 절규하는 새들과 팔딱거리는 물고기만이 그들의 고통을 나눈다. 몸 눕힐 곳 하나 없던 피란민에게 눈(雪)은 야속한 존재이면서도, 겨울이면 순백으로 변하는 고향땅 향한 그리움의 증폭제였으리라. 1950년 12월 노모(老母)를 남겨두고 일본인 아내 이남덕 여사, 두 아들, 장조카와 남으로 피란 온 이중섭의 자전적 이야기를 승화한 그림으로 보인다. 195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발표된 것으로 추정되나 1979년 개인전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또 다른 작품은 1951년 작 '섶섬이 보이는 풍경(세로 41㎝·가로 71㎝, 합판에 유채). 이중섭이 아내, 두 아이와 제주 서귀포의 작은 초가에서 피란살이할 때 그린 그림이다. 세찬 바람에 뼈가지가 휜 팽나무, 현무암을 쌓아 만든 돌담, 초가집 뒤로 바다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섶섬이 보인다. 세들어 살던 초가 근처 정방동 주민센터 쪽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섭의 풍경화 중 사실적이고 정확한 장소가 나와 자주 언급되는 작품인데 정작 소장처는 모른다.
두 작품 모두 동족상잔의 아픈 근현대사를 관통한 작품이다. 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은 이중섭 찾기인 동시에, 우리 현대사 되감기다. 작품을 소장했거나 행방을 아는 분은 조선일보 문화사업단으로 연락하면 된다. 우리의 이중섭을 함께 나누는 길이다. 문의 (02)724-6322
[왜 名畵인가] 폭발하듯 강렬한 붓질, 그의 인생을 닮았다
1980년쯤 어머니가 TV에서 화가 이중섭(李仲燮·1916~1956)의 처절한 생을 그린 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석원이가 저렇게 힘들게 살면 안 되는데…." 깊은 연민이었다. 당시 나는 미대 재학생. '이중섭'이란 화가의 대명사였기에 화가의 삶에서 고뇌와 궁핍이 숙명처럼 여겨졌다.
나는 외가가 있었던 포천에서 많은 동물과 어울리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우리 집에는 순한 암소가 있었다. 그 소를 관찰하며 그리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화가가 된 후에도 대체로 행복한 소를 그렸다. 그런데 이번에 덕수궁미술관에서 본 이중섭의 '황소'엔 환희나 평온은 보이지 않는다. 비장하다. 분청사기의 표면 같은 바탕에 우리 민족을 상징하듯 밝고 힘찬 선으로 거칠게 윤곽을 그렸는데 몇 개의 선만으로도 역동적인 황소의 모습이 생생히 표현되었다. ▷기사 더보기
"잘못 알려진 이중섭 일화 많아… 국민화가의 삶 제대로 조명해야"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1956년 이중섭의 은지화(담뱃갑 속 은지에 그린 그림) 3점을 소장키로 하자, 이중섭이 '내 그림 비행기 탔겠네' 하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는 일화를 예로 들었다. 그는 "당시 은지화를 MoMA에 기증한 아더 맥타가트 대구 미국문화원장이 '1956년 9월 MoMA로부터 소장 사실을 공식 통보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이중섭(1956년 9월 6일 사망)에게 알리지 못했다'고 쓴 기고문이 있다"며 이 에피소드가 꾸며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사 더보기
"신화에 빠진 이중섭을 구출하라"
이중섭은 한국에서 작품 호(그림 크기의 단위)당 평균 가격이 두번째로 높은 화가다. 비싼 만큼 그의 작품을 둘러싼 진위(眞僞)논란은 잦았고 이목도 집중시켰다.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에 따르면 2003~2012년 감정한 이중섭 작품의58%가 가짜였다. 박수근·천경자·김환기 등 유명 화가들보다 위작 비중이 높다.
2005년엔 유족이 직접 내놓은 이중섭 작품조차 가짜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중섭 위작(僞作) 수백점을 가진 대규모 조직이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위작 논란에 검찰까지 나섰다. 2007년 검찰은 이중섭·박수근의 작품이라는 그림 2800여점이 가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위작 논란 여파로 2006년 이중섭50주기는 기념전 하나 없이 지나갔다.
이중섭은 입버릇처럼 자기 작품을 ‘가짜’라고 했다고 한다. 위작이란 얘기가 아니라 수양이 부족하다는 겸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위작 논란은 사후에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이중섭의 지인이었던 김광균 시인은 이중섭의 진짜 은지화를 판별하는 나름의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미군 레이션에 들어있는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 은박지가 진짜라는 것이다.
미술에서 대가의 작품에는 으레 위작이 따른다. 그래서 정확한 감정(鑑定)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진짜라고 판정하는데도 작가 본인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작가가 자기 작품을 못 알아보고 가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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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화가' 이중섭의 대표작을 찾습니다|작성자 J 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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