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2.09 03:00
[이효열씨의 설치미술… "감동 받아" 인증샷만 2600건]
- 副題 '뜨거울때 꽃이 핀다'
'남을 데워주는 연탄처럼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의미… 서울 200여곳에 설치
- "가난에 감사한다"
"어릴땐 판잣집이 싫었는데…" 집에서 사용한 연탄재 활용, 꽃값은 편의점 알바로 충당
서울 시내 곳곳에 연탄꽃을 놓아둔 주인공은 설치미술가 이효열(28)씨다. 연탄재는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세련된 옷차림의 이 청년은 서울 강남의 마지막 남은 판자촌 주민이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가족과 함께 구룡마을로 이주해 줄곧 살고 있다. 꽃을 품으며 되살아난 연탄재는 이씨 집 연탄 난로에서 몸을 불사르고 나온 것이다. 이씨는 "판잣집이 부끄러워 어렸을 적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이런 사정을 모르는 분들은 '20대 주제에 연탄을 아느냐'고 면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어릴 때 축구 선수가 꿈이었다. 대학 전공도 사회체육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오른쪽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서 축구를 포기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에는 연기자가 되려고 연기 학원도 몇 달 다녔지만 곧 접었다. '세상 경험을 하겠다'며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방황하던 이씨는 호주에서 돌아온 직후인 2010년 서점에서 우연히 잡은 광고 관련 책 한 권에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이씨는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짜고짜 저자의 이메일로 평소 생각해온 공익 광고 아이디어를 적어 보냈다"고 했다.
이메일을 받아 본 저자는 이씨를 교육생으로 받아줬고, 이씨는 이듬해인 2011년 이 저자가 운영하는 광고 관련 연구소에 입사했다.
하지만 이씨는 2년 뒤 "내 이름을 걸고 예술을 해보고 싶다"며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만든 첫 작품이 '뜨거울 때 꽃이 핀다'는
부제(副題)를 단 연탄꽃이었다. 이씨는 "집 앞에 있는 연탄을 보다가 문득 '연탄도 저렇게 뜨겁게 자신을 태워서 남을 데워주고
생을 마감하는데, 나도 연탄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연탄에 꽃을 꽂아봤다"고 했다.
2013년 겨울 처음으로 서울 강남대로에 연탄꽃 작품을 설치하자 뜻밖의 반응이 왔다. 인터넷에 '강남 길 한복판에서 연탄꽃을 봤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글이 올라온 것이다.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는구나'라고 생각한 이씨는 다른 곳에도 연탄꽃을 심었다.
꽃을 꽂은 연탄재를 발로 걷어차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부러진 꽃을 다시 꽂아주거나 비 오는 날 연탄꽃이 젖지 않게 우산을 씌워줬다. '너는 나를 떠났지만,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 같은 마음을 담은 쪽지를 놓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작품을 놓고 오면 '작가님이 꽃 선물을 주고 갔다'며 반기는 카페가 늘었고, "우리 학교 앞에도 놓아 달라"고 연락을 해오는 학생들도 생겼다.
최근엔 서울시립미술관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건물 앞에 놓인 이씨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공식 SNS에 올리기도 했다.
이씨가 2년 동안 연탄꽃을 놓아뒀 던 곳은 200여 곳이 넘는다. 이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꽃을 갈아준다. 생활비와 꽃값은 카페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충당했다. 이씨는 "어릴 땐 가난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이런 작품을 만들 게 해준 가난에 감사한다"며 "이 작품을 통해 연탄처럼 모두가 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자' '거의 다 왔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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