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가 그린 〈한복 입은 남자〉. 1600년대 유럽 미술계의 거장이자 서양미술사 전체를 통틀어도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루벤스가 그린 이 소묘의 모델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훗날 이탈리아로 팔려간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인물이라고만 짐작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오 코레아란 인물은 뮤지컬로, 소설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그의 생애가 그만큼 드라마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안토니오 코레아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이탈리아 상인에게 팔려 로마까지 간 조선인 청년(혹은 소년)이다.
문헌 기록상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은 인물이다.
안토니오 코레아의 로마 입성을 기록한 책은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 일주기》다. 카를레티는 피렌체의 유명한
상인 집안 출신으로 1636년 62세의 나이로 피렌체에서 사망하는데 《나의 세계 일주기》는 그가 죽은 지 65년이 지난 후인
1701년에 간행됐다. 1606년에 원고 작성이 끝났지만 처음 간행하기 전까지는 여러 번 필사를 거쳤다고 한다. 이 책은 카를레티가
임진왜란 발발(1592년) 후인 1597년 6월부터 1599년 12월까지 일본 나가사키, 마카오 등을 항해하던 도중 생긴 일들을 기록했다.
2부 6장, 총 6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감안하면 이 책은 안토니오 코레아와 관련한 부분을 상대적으로 아주 짧게 언급하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코레아란 나라는 모두 9개 주로 나뉘어 있으며, 일본군은 그 나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수의 남녀를 잡아다 헐값에 노예로
팔았는데 나도 다섯 사람을 산 후 인도 고아까지 데리고 가서 자유인으로 풀어 줬다. … 그중 한 사람을 플로렌스까지 데려왔는데
지금은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살고 있다.〉
이게 안토니오 코레아와 관련한 내용의 거의 전부다. 하지만 이 짧은 기록은 훗날 이탈리아 알비 마을에 사는 코레아 성씨,
1600년대 바로크 미술의 거장(巨匠)으로 불리는 루벤스의 소묘(素描・일반적으로 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선으로 그리는 회화)
등과 결합하면서 신화를 만든다.
안토니오 코레아와 루벤스의 만남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한국일보》 1979년 10월 7일자 〈이탈리아 코레아 씨들의 마을: 뿌리는 한국인이었다〉 제하 기사였다. 당시 《한국일보》 파리주재 특파원이었던 김성우(金聖佑) 기자가 쓴 이 르포 기사는 이탈리아 남부 알비라는 마을에 코레아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이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이라는 내용이었다.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 일주기》에서 소개한 안토니오 코레아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카를레티를 따라서 로마까지 왔다는 등의 고증과 함께 코레아 성을 가진 알비 마을 주민들의 자신들 시조가 비(非) 유럽계 인물이었다는 증언도 함께 소개했다.
하지만 알비 마을에 안토니오 코레아를 시조로 삼는 코레아 씨 집성촌이 있다는 것은 훗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이탈리아에 코레아(Corea)라는 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알비 마을에 사는 코레아 성씨들은 로마 제국 이전 그리스 등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게 정설이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안토니오 코레아와 이탈리아에 사는 코레아 성씨들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국내 한 방송사가 임진왜란 발발 400주기를 맞아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도 한국인의 혈청과 이탈리아 코레아 씨의 혈청을 비교한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이 프로그램은 400여 년 전 유럽으로 간 한국인의 뿌리가 유럽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이탈리아 코레아 성씨들에게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다.
어쨌든 《한국일보》의 이 기사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79년 당시로서도 지리적으로 결코 가깝게 느낄 수 없었던 유럽에 400여 년 전에 끌려간 한국인의 후예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것은 민족적 자긍심까지 느끼게 하는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후속 보도들이 이어졌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존재가 더 큰 주목을 받게 된 때는 김성우 기자의 보도가 있은 지 4년여가 흐른 1983년 11월 말이었다. 그해 11월 29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루벤스가 그린 소묘 작품 한 점이 경매에서 낙찰됐다. 루벤스의 소묘 작품 제목은 〈한복 입은 남자〉로 미국 게티박물관이 당시 소묘 그림으로서는 사상 최고 경매가인 32만4000파운드에 낙찰 받았다.
소묘 작품 사상 최고 경매가도 주목을 받았지만 국내 언론은 〈한복 입은 남자〉라는 작품 명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보도했다. 경매 소식을 전하는 《경향신문》 1983년 12월 1일자의 기사 제목은 ‘〈한복 입은 남자〉의 주인공은 임란(壬亂) 때 조선인’이다. 다음은 그 기사 발췌문이다.
〈… 3억8000만원 상당에 경매된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한국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인 최석우 신부에 의하면 당시 이태리인으로 수사(修士) 수업 전 세계 일주에 나섰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 조선인 포로 5명을 사서 세례를 주고 데려갔다고 한다.
1598년 일본을 떠난 카를레티는 마카오를 거쳐 인도 고아에 도착, 4명을 자유인으로 풀어 주고 그중 1명만을 1606년 이태리 플로렌스로 데려갔다. 이 소년은 그 뒤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그곳 교회에 교무로 종사하며 이태리에서 일생을 마쳤다. ….〉
이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카를레티가 수사 수업을 받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수사가 아닌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사가들이 임의로 수사라는 직분을 갖다 붙였을 개연성이 높다.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 일주기》 어디에도 그런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의 오류
노성두 박사는 〈한복 입은 남자〉가 그림의 위와 아래가 잘려나갔다고 주장했다. 이 그림은 제단화를 참고로 복원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인이 착용하고 있다는 방건과 철릭은 조선 복식이 아니라는 게 노 박사의 주장이다. |
이 논문에서 야마구치는 아무런 근거도 내놓지 않고 카를레티를 승려(僧侶)라고 했는데 훗날 한국 사학자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카를레티를 ‘신부’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곽 교수의 주장이다. 곽 교수는 이로 인해 훗날 카를레티와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사실 왜곡이 발생하게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어쩌면 이 같은 사실의 오류들이 연속되며 안토니오 코레아를 둘러싼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토니오 코레아가 교회에 교무로 종사했다는 내용도 그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나의 세계 일주기》에 없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카를레티가 밝힌 내용은 ‘안토니오가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가 뒤에 교회 교무로 시무했다는 사실 역시 교회 사가들의 상상력이 덧씌워진 결과물인 것이다.
같은 해 《중앙일보》 12월 2일자 기사도 비슷한 시각으로, 〈한복 입은 남자〉의 경매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도 카를레티의 신분을 가톨릭 수사로 소개하고 있다.
〈…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한복 입은 남자〉의 탄생 경로다. 사진에 나타난 그림 속의 남자는 상당히 ‘한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림의 한복 자체는 차라리 우리에게 낯익지 않지만 ‘남자’의 기품과 태도는 한국적인 데가 있다. 시골 선비풍이다. 복식 전문가들은 그 그림의 한복이 조선조 초기에 흔히 있었던 철릭(天翼)이라고 한다.
머리에 쓴 모자도 인상적이다. 그건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쓰던 충정관 같기도 하고 사방관 같기도 하다. … 그 한국인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납치된 뒤 가톨릭 수사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에게 노예로 팔려갔던 한국인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이 있다. …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는 근 4백년 전 유럽에 있었던 ‘기구한 한국인’의 운명을 생각게 한다.〉
이렇게 당대 미술계의 거장 루벤스와 ‘기구한 한국인’ 안토니오 코레아는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한 지점에서 만난다.
물론 루벤스가 그린 소묘의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당시 화가이면서 숭의여전 교수였던 김정(金正)의 〈루벤스의 한국인상 소묘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이 대표적이다. 다음은 김 교수의 논문을 소개한 《조선일보》 1984년 12월 4일자 기사 중 일부다. 조닷 이하생략